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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호 Mar 19. 2021

쇼피알과 디앤알

3월 2주 차가 지날 즈음에는 몇 번의 심폐소생술을 했는지 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급종합병원의 내과 병동에는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들이 수도 없이 입원했고, 대부분은 살아서 병원을 나가지 못했다. 그만큼 하루에 여러 번 심폐소생술을 해야 했고, 대부분 소생술은 실패로 끝이 났다. 드물게 심장 박동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꼭 내가 흉부압박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런 경우가 잦았다.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었지만, 마음은 괜히 뿌듯했다.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손맛은 매우 짜릿했고, 나는 흉부압박에 중독되어 더욱 열정적으로 소생술에 임했다.


그즈음 2층의 신장 투석실에서 투석을 받다가 심정지가 온 환자가 있었다. 급히 달려가서 심폐소생술을 했는데, 이번에도 나의 흉부압박 차례에 심장 박동이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 1시간쯤 지났을, 이번에는 12층 병동에서 코드블루가 발생했다. 얼른 달려갔더니 투석실에서 심정지가 왔던 그 환자가 있었다. 심정지에서 회복된 환자는 중환자실로 가는 것이 원칙인데, 일반 병동에 있는 것이 이상했다. 주변 분위기도 평소 코드블루 상황과 달리 굉장히 차분했다. 어쨌든 흉부압박을 시작하려는데, 옆에 있던 레지던트가 말했다.

“살살 한 사이클만 하세요. 쇼피알 알죠?”.

쇼피알? 처음 듣는 단어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서 평소처럼 강하게 흉부압박을 시작했더니, 레지던트가 나를 제지했다.

“선생님, 살살. 살살. 구두로 DNR 받았어요” 레지던트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DNR. 아는 단어였다. Do Not Resuscitate. 심장이 멈추면 소생술을 하지 말고 그대로 보내 주라는 의미다. 그제야 레지던트의 말이 이해가 됐다. 하는 둥 마는 둥 2분 동안 살살 흉부압박을 했다. 2분이 지나자마자 심폐소생술은 종료됐고, 레지던트는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했다.


다시 일하러 가는 길에, 인턴 동료가 쇼피알에 대해 설명해줬다. 쇼피알은 ‘쇼(show)’와 ‘씨피알(CPR, 심폐소생술)’의 합성어로, 환자를 살리려는 의도 없이 보여주기 식으로 하는 심폐소생술이라는 뜻이었다. 말도 안 되는 행위처럼 느껴졌지만, 탄생 배경을 듣고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피알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의 심장이 멈추면 소생술을 시도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 달라는 DNR이라는 제도는, 환자가 사전에 스스로 의향서를 작성해야만 유효하다. 하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다. 본인이 의지가 있어도 가족들이 반대하는 경우도 많고, 혹시나 완치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결정을 미루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가 병이 갑자기 악화되어 환자의 자기 결정 능력이 사라지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환자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기 시작하면, 의사는 보통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고, DNR을 권유한다. 가족들은 대부분 편하게 보내 드리자는 마음으로 DNR에 찬성하긴 하지만, 환자의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DNR을 유효하게 만드는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 법에 ‘가족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 지내는지 모르는 환자의 형제자매나 초등학생 손자에게까지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임종까지의 시간 동안 동의를 모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찾는 타협점이 쇼피알이다. 우선 현재 병원에 있는 가족들에게만 서류가 아닌 구두로 동의를 받아 ‘구두 DNR’ 상태로 만든다. 하지만 구두 DNR은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는 의사의 의무를 없애지는 못한다. 그래서 심장이 멈추면 쇼피알로 짧게 소생술을 마치고, 기록에는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사망했다고 적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가족들은 마지막을 편하게 보내 드릴 수 있고,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간단히 할 수 있기에 모두에게 좋다. 환자의 죽음에 환자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모순은, 어차피 죽을 환자였다는 말에 가려지게 된다.


DNR은 모든 인턴들이 칭송하는 최고의 제도였다. 인턴은 사방에서 밀어닥치는 일에 포위된 병사와도 같은데, 코드블루는 그 와중에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폭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폭탄이 떨어지면 하고 있던 모든 일은 즉시 중단되고, 못해도 30분은 걸리는 심폐소생술에 투입되었다. 내가 맡은 구역에 떨어지면 일이 더 많아졌다. 환자가 사망하면 뒷정리를 해야 했고, 소생되면 중환자실까지 끌고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마치고 오면 어느새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하루에 두 번만 코드블루가 터지면 정시 퇴근은 물 건너가곤 했다.


하지만 DNR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환자가 눈 앞에서 숨이 넘어가도 DNR이라는 간호사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DNR이 준비되지 않은 환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레지던트가 어서 가족들을 설득하여 구두 DNR이라도 받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레지던트가 DNR을 받아오면 속으로 만세를 외쳤고, DNR을 잘 받는 레지던트일수록 인턴들 사이에서는 뛰어난 레지던트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가끔은, DNR에 열광하는 나의 모습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사람 살리자고 의사가 된 건데, 내 한 몸 편하자고 환자의 생명을 경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살릴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심폐소생술을 할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폐소생술이 의미 없는 환자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런 환자에서는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은 환자가 정말 하지 않아도 되는 환자였기를 바랄 뿐이었다.


‘DNR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환자? 가족? 의사?’ 불필요한 의료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의사가 DNR의 수혜자인 것은 분명했다. 가족에게도 명확한 금전적 이득이 있었다. 임종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거치는 중환자실 입원, 연명치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음으로써 절약하는 의료비는 상당했다. 그렇다면 환자는 DNR로 무엇을 얻고 떠나는가? 부러지지 않은 갈비뼈? 더 생각나는 게 없었다. 결국 죽는 것인데 얻어가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도 같은 상황이라면 나도 DNR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며, 심폐소생술이 최악이라면 DNR은 차악 정도는 되겠구나 생각했다.


더 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DNR에 더 열광하게 될수록, 흉부압박에 대한 열정은 점점 사그라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의 흉부압박 차례에서 환자의 심장 박동이 돌아오는 기현상은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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