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 카페가 생겼다. 자그마한 갤러리가 있던 반지하 공간인데 예술이 자리하기에는 너무나 외진 주택가였다. 서너 번의 전시를 끝으로 그 공간은 카페가 되었다. 그 카페에 처음 방문하던 날. 카페 공사 할 때부터 여기 지나다니시는 거 봤어요, 라는 주인의 말과 함께 따뜻한 개업 떡을 받아든 순간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단골이 되었다.
돌아보면 한 때 ‘단골’이었던 공간들이 꽤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거형이 되었다. 친밀감의 절정을 찍은 후, 급격히 시들해지는 요상한 징크스 때문이다. 새로운 단골카페가 생긴 기념으로 그간의 단골집을 돌아본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깔끔한 플레이팅이 마음에 들어 자주 찾던 백반집. 집사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당시 나도 길고양이를 정성스레 돌보고 있던 터라, 고양이로 급격히 친해지게 되었다. 길고양이를 동물병원으로 데려가는 데 도움을 주겠다며 휴일에 차까지 끌고 우리 집을 방문했던 사장님 부부. (결국 박스에 담기를 실패해서 동물병원은 못갔다.) 고마운 마음에 꾸준히 식당을 찾다가, 어느날부터 시들해졌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식당의 반복되는 메뉴와 잦은 야근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바도 한 때는 단골이었다. 평소 술을 마시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도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부어라 마셔라 하던 때. 그 곳의 음악이 좋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사장님과 함께 담배를 태우며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것이 좋았다. 항상 바를 함께 찾던 친구가 외국인 노동자를 자처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떠난 이후, 자연스레 발길이 뜸해졌다. 이제는 지인들과 어쩌다 한 번씩 찾는 바가 되었고, 사장님과도 인스타그램으로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는 정도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단골집을 잃은 기억도 있다. 보통 나는 단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 카페 모카가 참 맛있던 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카페 사장님을 클럽에서 마주치게 된다. 일 년에 한번 갈까 말까하는 클럽에서, 그것도 하필 단골 카페 사장님을 마주치다니.희박한 확률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서로를 알아보고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하지만 당혹감도 잠시,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테차를 나눠 마시며, 빽빽한 사람들 틈에서 정말 신나게 춤을 췄다. 내일이 없을 사람처럼 춤을 추고, 그 카페에 다시 가는 일은 없었다.
밥 한 끼 먹으려고, 술 한잔, 커피 한잔 마시려고 찾아간 공간에 마음이 가는 일. 그건 아마 내 취향을 이해받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 한 스푼, 그리고 나의 정서와 결을 함께 하는 곳에 대한 반가움 한 스푼일거다. ‘나와 같은 취향을 갖고 있구나, 이 사람도 이런 느낌과 분위기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우연히 가까워진 관계가 우연히 멀어질 때, 그 어색함을 견디기란 생각보다 힘들다. 가게 앞을 지나갈 때 핸드폰을 보는척 하고,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사장님과 쌓은 얇고 짧은 정을 배신하는 것만 같은 죄책감과 부채감이 들기도 한다. ‘단골’의 자격은 일정한 소비를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까, 싶지만 아무 대가성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도 비슷한 것 같다.
고교 시절, 보물처럼 숨겨진 노래를 찾아 함께 들으며 내 세계를 온전히 공유했던 친구.
대학 시절, 해가 뜰 때까지 술잔을 함께 기울였던 친구.
그리고 지금, 퇴근 후 지친 몸뚱이를 침대에 뉘이고 남은 손가락의 힘으로 신세한탄 카톡을 주고받는 친구는 모두 다르다.
어쩌면 자연스레 소원해진 관계에 너무 마음 쓸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멀어진 관계들을 애써 붙이지 않아도 된다. 그 시절, 그때, 나를, 내 정서를 이해하고 함께 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람이 길게도 불고, 짧게도 불고, 때로는 잠시 멈추는 것처럼. 그저 가끔씩 희미해진 관계의 끈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