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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Feb 20. 2024

[별글] 225_ 도시락

  살면서 도시락을 가장 열심히 쌌던 시기는 짝꿍이 공무원 준비를 할 때였다. 가을 겨울에는 보온 도시락통에 따뜻한 국과 반찬을 담았고, 여름에는 네 칸으로 된 도시락통에 밥, 야채, 반찬, 나물까지 야무지게 담았다. 지금 생각하면 매일 다른 반찬을 어떻게 만들었나 모르겠다. 그것도 이 좁아터진 자취방 주방에서 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반찬은 무나물이다. 채를 썰어도 썰어도 끝이 나지 않아서 굉장히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완성한 무나물을 짝꿍이 맛있게 먹어주어서 다행이었지만, 다시는 그 이후로 무나물은 만들지 않았다. 


  그때 도시락을 쌌던 이유는 고시촌의 외식 음식들이 대부분 탄수화물 위주로 되어 있어서 건강이 매우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조교 근무를 할 때라서 학식의 가능성도 열려 있었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양한 음식을 먹기에 자유로운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짝꿍이 다니는 학원 근처의 음식점은 온통 컵밥, 컵밥, 그나마 식사 같은 메뉴는 돈가스나 쌀국수, 이런 것들이었다. 건강 이슈도 가진 짝꿍이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해야 하는데 밥이라도 건강하게 먹으라고 도시락을 열심히 쌌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너를 위해서도 그렇게 정성을 들여 보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도시락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입맛을 가졌다. 나는 혀가 데이기 딱 직전의 음식 온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온이 잘 되는 도시락통이어도 따뜻한 음식일 수는 있지만 뜨끈한 음식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조교실에 출근할 때는 열심히 도시락을 싸 다니기도 했다. 조교실에는 전자레인지가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대학교에 다니게 된 지금은 몇 번 도시락을 만들었다가 처참하게 후회했다. 학교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공용 전자레인지를 찾을 수 없었다. 차갑게 식은 밥을 먹으면서 제발 공용 전자레인지를 만들어 달라고 빌었다. 한 번은 몰래 편의점에서 물만 사고 편의점 전자레인지를 쓴 적도 있지만 너무 눈치가 보였다. 그 이후로는 도시락을 포기하고 산 밥으로 연명하고 있다. 


  사실 따끈하지 않아도 반찬의 다양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면 도시락을 맛있게 먹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시험 감독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서 먹은 도시락에는 김치도 떡갈비도 계란말이도 있어서 미지근했지만 소풍 온 기분으로 즐겁게 먹었다. 하지만 생존용 도시락을 그렇게 다양한 반찬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맛의 다양성도 없는 상황에서 미지근하기까지 하면 한 끼가 너무 서럽다(나는 이것저것 먹고 싶은 욕심은 많은 소식가라서 맛없는 음식으로 한 끼를 채우는 걸 정말 서러워한다). 


  그래도 누군가의 도시락을 챙길 일이 있다면 또 기꺼이 다양한 반찬을 고민할 것이다. 맛있게 먹으라고 쪽지도 써서 붙여줄 것이다. 그리고 남은 반찬으로는 다시 데워서 내 한 끼를 따끈하게 챙겨야지. 도시락을 받은 사람에게 연락이라도 온다면 밥맛이 더 좋게 느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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