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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꽃피는 Apr 08. 2020

그 거리의 기억

태어나서 35년가량을 한 장소에서 살았다. 우연히 볼 일이 있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평생 교육원 과정까지 다니던 옛 동네의 큰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거리의 기억.  그 모든 추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은 아니다. 물론 그 길에 얽힌 수많은 기억이 있겠지만, 마치 URL 링크를 클릭한 것처럼 선명하고 또렷하게 생각나는 기억 하나가 다른 모든 이야기를 밀어낸다.





god의 노래 가사가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어릴 적에 우리집은 가난했었고"....로 시작하는 옛이야기 하나쯤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고, 그마저도 쌀이 떨어져 컴컴한 방에서 셋이 굶고 앉아 있으면 외할머니가 지나가다 들러서는 그 꼴 보고 화내시며 쌀팔아다 주시곤 했다고 하니까.


그런데, 우리 엄마는, 밥은 굶어도 공부는 시키려고 했다. 그 형편에 말이다, 나는 대학 병설 유치원에 다녔다. 지금은 유치원 통학 버스는 기본이지만, 내가 70년대에 태어났음을 감안해주시길. 그 당시 우리 동네 아이들 중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은 나 밖에 없었다. 엄마는 허리띠를 졸라 비싼 유치원비와 원복과 각종 실습비를 부담하며 나를 그곳에 보냈다.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역시 대학 병설 유치원답게 지금의 유치원 시설과 비교해도 전혀 빠지지 않을 만큼 좋은 교육 환경이긴 하더라.


집에서 유치원까지는 도보로 15분 남짓이었지만, 기찻길 하나, 8차선 도로 하나, 8차선 육교 하나를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라서 유치원 통학버스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45인승 통학버스를 운영하는 유치원이라는 말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고급 유치원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어느 해 겨울. 방학이라고 고종사촌 오빠가 지네 친할머니 댁에 와 있었다. 오빠네 친할머니 댁도 우리 동네 - 정확히는 유치원 아래에 있었기에, 유치원을 마치면 오빠랑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던 것 같다. 6살, 7살 짜리들의 약속.


하지만, 유치원에서 친구들이랑 재미나게 놀면서 나는 사촌 오빠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유치원 통학 버스에 올라탔다. 멀리서 유치원 마칠 시간에 맞춰 나와서 나를 기다리던 사촌 오빠는 달리는 버스를 따라 뛰면서 날 애타게 불렀고..... 다행히 그 길은 통행량이 워낙 많은 길이라, 머지않아 버스는 따라잡혔고, 버스 문을 두드리는 오빠의 고사리 손, 사정을 들은 선생님께서 나를 차에서 내려 주시면서 그날의 만남이 성사되긴 했지만, 상상을 해보시라. 무슨 애절하고 애타는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동하는 유치원 버스를 따라 7살 짜리 소년이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소리치며 달려가는 장면을 말이다.


별거 아닌 해프닝이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세월이 흘러도 그때 그 기억만큼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둘이서 만나서 뭘 하고 놀았는지 뒷이야기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데 말이다. 나만큼이나 어렸던 사촌 오빠의 기다림에 대한 미안함, 약속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했던 본인에 대한 어이없음.... 뭐 어떤 감정 때문이었을까?




유치원이 있던 전문대학 옆에 위치했던 여고를 다니면서, 나는 계속해서 그 길에 많은 추억을 흩뿌리고 다녔지만 그 모든 기억을 압도하는 어린 시절의 그날, 그날이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다.


그건 지금, 사촌 오빠와 고모와의 연이 끊어졌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굉장한 미모의 수재였던 고모.

늘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고, 완벽한 모습에 잘못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이 예민했던 고모.  


어린 내가 보기에도 고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아들만 둘 있는 고모는, 조카딸인 나를 정말 딸처럼 아껴주고, 여러모로 금전적인 후원도 필요하면 아끼지 않고 해주었다. 방학만 되면 고모집에 놀러 가서 개학할 때까지 한 달 내내 거기서 사촌 오빠랑 사촌동생이랑 놀다 올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지금 고모는 자신의 친어머니인 할머니를 포함한 모두와 연을 끊고 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면 황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예민한 고모가 세상 사람들을 피해 칩거했다고 말해야 할까.


사촌 오빠가 이혼을 하니 마니 하는 소문이 들렸고,

대학 1학년 1학기에 CPA 1차 합격할 정도로 영민했던 사촌동생이 계속된 고시생활에 고시 낭인이 되어 가출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그렇게 고모는 일가친척 모두와 연을 끊고 칩거 생활을 십수 년째 이어가고 있다.


이혼한다고 집을 박차고 나갔던 사촌 오빠는 다행히 다시 재결합해서 잘 지내고는 있는데, 고모와는 일체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혼 사유가 될 뻔했던 것이 고부간의 갈등이었던 걸까? 왜 고모랑 연락을 안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사촌인 나와도 연락이 될 리가 없겠지.


그래도 어린 시절 형제처럼 늘 같이 지내며,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자라났던 것 같은데,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걸까? 세월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이런 상황을 보면, 내가 고모 입장이라도 일가친척들과 교류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긴 하다. 자식 두 명이 모두 부모인 자신을 피해 연을 끊고 있으니,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겠지.




기억이라는 게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어린 날 통학하던 그 길,

그 길이 내 머릿속에 각인된 사촌 오빠와의 해프닝을 불러냈고,

또 그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고모네 식구들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지는 오늘 하루....



여러분의 추억은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따뜻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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