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올해 아흔여섯, 특별한 병 없이, 아픈 곳 없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연명치료 없이 깔끔하게 돌아가셨다. 말로만 듣던 "호상"이라는 말을 이럴 때 써도 괜찮지 않을까.
5월 말 3년가량 계시던 요양병원에서 전화를 받았다. 노쇠하셔서 식사를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면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로 이동, 수액을 맞고 계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었다. 서울에 계시던 큰아버지께서는 부랴부랴 내려오셨고, 코로나로 인해 일체의 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산에 있는 우리는 발만 동동 굴렸다. 할머니의 임종을 예상했던 병원에서는, 가족들 대표로 큰아버지 단 한분만 면회를 허락했다. 다행히 할머니께서는 다시 기력을 되찾으셨고, 언제나처럼 맑은 정신으로 하고픈 이야기를 다하셨다고 한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OO이도 임신을 했고...."
사실 여한을 가지려면 가질 일이 없진 않으셨지만, 46이라는 나이에 내가 아기를 가진 것, 그것 하나만으로 할머니 가슴속의 풀리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들 덮을 만큼, 할머니에게 나는 가까운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내 출산은 8월로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제발 그때까지 할머니께서 살아계시길 기도했다. 6월 한 달이 정신없이 흘러갔고, 7월이 되었다. 간호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곰국을 먹고 싶다고 하셔서, 평소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던 병원 직원분이 집에서 직접 끓인 곰국을 가져다 드렸다고 한다. 식욕이라는 것이, 삶에 대한 의지와 기력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안심했다. 8월까지도 할머니께서 거뜬히 버티실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곰국이 아마도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암으로 돌아가신 친구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라면을 그렇게 드시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할머니께서는, 조금을 더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7월 초순의 어느 날, 세상에 작별을 고하시고 떠나셨다.
사실 혈연이라고 하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가족이라는 관계의 끈은 참으로 허망하다. 세상 무엇도 끊을 수 없을 것처럼 끈끈하고 질기고 튼튼한 것 같지만, 세월 앞에서 좀먹고 쉽게 바스러진다. 나와 할머니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일 년에 기껏해야 4번 얼굴을 마주했다. 설날, 추석, 어버이날, 할머니 생신. 그마저도 나는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4번이지만, 아마 나의 사촌들은 평생을 통틀어 할머니와 함께 보낸 날들이 한 달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인 큰아버지조차도 일 년에 한두 번 할머니를 찾았고, 딸은...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할머니와 절연한 채 십수 년을 보냈으니, 할머니의 노년의 삶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다행히, 할머니께서는 흔히 말하는 보스 기질이 있으신 분이라, 가족과의 관계망이 다 바스러졌어도 빼어난 사교술로 사람들을 휘어잡으며 스스로가 만든 공동체에서 즐겁게 지내셨다고 추측한다. 물론, 현명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지갑을 아낌없이 여셨고. 다만, 입도 함께 여셨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아낌없이 여는 지갑 덕분에 나이 어린 온갖 수양딸, 의붓딸들이 있었고, 다행히 그네들은 이것저것 할머니로부터 챙길 것을 챙긴 만큼 이런저런 심부름과 "딸 노릇"을 해주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아흔인 할머니께서 주선한 선자리를 통해 남편을 만나 결혼한 것만 봐도 우리 할머니의 사회적 관계망이 얼마나 다채로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4년가량을 요양병원에 계셨지만, 다들 건강하신 분들이 모여 계시는 호스텔 같은 곳이어서, 족발, 수육, 회, 치킨, 피자 별의별 배달음식을 다 시켜 드시고, 병원에서 노는 게 심심해서 방문판매 온 상인으로부터 마늘을 사서 다듬어 주시는가 하면, 어느 때인가 가면 이불을 사서 주시고, 스무 살에서 서른 살가량 어린 다른 할머니들과 어울려 재미나게 노셨으니, 제 살기에 바쁜 피를 나눈 가족들보다 같이 지낸 병실 메이트들이 더 할머니의 찐 가족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통 없이, 편안하게, 본인의 말씀대로 "아무 여한 없이" 세상을 뜨셨으니, 애달파하고 곡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태어날 아기를 할머니께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고, 코로나로 올 설에 뵌 이후,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임종하신 것이 안타깝고, 임신했다는 이유로 빈소에 발도 못 들이게 하는 상황이 속상할 뿐.
사실 엄마는 할머니께서 더 이상 혼자서 끼니를 챙겨 드실 기력이 없어지면서 요양병원으로 가실 때 고민을 많이 하셨다.
"여기 와서 같이 사입시더~"라는 그 한마디, 엄마는 끝끝내 그 한마디를 할머니께 건네지 못했다. 내 입장에서는 할머니가 나를 키운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엄마에게 할머니는 당신이 베풀어 준 것이 많아도 늘 못해준 것이 더 먼저 생각나는 괴팍하고 성깔 있는 과부 시어머니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래도 할머니한테 받은 게 많잖아."
엄마가 대답하셨다.
"니는 많나? 나는 그런 거 없데이."
큰어머니의 경우, 며느리 길들인다고 할머니께 머리채를 쥐어 뜯겼고, 엄마만 하더라도 할머니께 멱살을 잡혔다고 하니 말이다. 엄마는 차마 쌍방폭행 사건을 일으킬 수는 없어서 두 손으로 팔짱을 낀 채 몸으로 할머니를 밀어붙이며 육탄전을 벌였다고 했다. 그러니 엄마의 발언 앞에서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하고픈 말 정도는 서로 할 수 있는 고부관계가 된 이후, 엄마가 할머니께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때 왜 그랬느냐고. 할머니께서는 처음에는 그런 일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잡아떼시다가, 고백하셨다.
"모르겠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다"
그랬던 고부관계였기에, 마음 한편으로는 나 한 몸 희생해서 내가 모신다고 할까라는 생각과, 다시 한번 누군가의 수발을 들며 남은 인생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엄마는 갈등했다. 그리고 결국 모른 척하기로 결정을 내리셨다. 그래, 당신께서 낳은 아들과 딸도 모른 척하는데, 평생 고생한 엄마에게 또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할머니께서는 요양병원으로 가셨고, 다행히 호스텔처럼 좋은 분위기와 다들 건강하신 분들만 계신 곳이라서 우리도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빈소에서 고종사촌 오빠가 전화를 걸어왔다. 완전히 풀이 죽어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 너는 그럴만하겠지. 오빠는 차마 할머니 얘기는 못하고, 고모 얘기는 못 꺼내고 계속 우리 엄마 얘기만 반복했다.
"오랜만에 숙모(우리 엄마)를 보니까, 우리도 이제 많이 늙었다, 진짜."
그는 그 말만 계속 반복했다. 누구나 칭찬하던 미모의 소유자였던, 심지어 6년 전 나의 결혼식에서조차도 신부 예쁘다는 말보다 신부 어머니의 미모에 대한 칭찬이 더 많이 나왔다고 친구들이 놀렸던 엄마가 이제 초로의 노인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사촌오빠가 놀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빠의 넋두리의 대상은 나도 아니고, 우리 엄마도 아니었다. 그는 그 얘기를 고모에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뭔가 많이 웃긴 상황인데, 고모는 할머니랑 연을 끊었다. 할머니와 절연하면서, 다른 모든 친척과 가족들과의 연도 같이 끊었다. 그럴 만큼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가족사나 사건이라도 있었다면, 이야깃거리라도 될 텐데, 너무나 황당한 연유라서 설명하기도 구차할 정도의 사연.
이왕에 입사를 했으니, 임원은 달아봐야 되지 않겠냐며 야심만만했던 S맨이었던 사촌오빠가 이혼을 하니 마니 하고 집을 나가면서 회사마저도 때려치우고 고모와의 연을 끊었다. 대학 1학년 때 CPA 1차 합격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촌동생이 십여 년 이상 고시낭인이 되어 떠돌다가 고모와 연락을 끊고 집을 나갔다. 평생 단 한 번도 속을 썩인 적이 없던 아들 둘의 연이은 가출은 고모를 점집으로 이끌었다.
점쟁이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외손주들을 너무 아끼는 바람에 손을 타서 아이들의 일이 잘 안 풀린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읊어댔다. 고모는 할머니를 원망하며, 우리 집안 식구 모두를 원망하며, 본인은 얼굴도 기억 못 할 나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원망하며 연을 끊었다. 이 이야기만으로 충분히 웃긴데, 더 웃긴 지점은, 절연한 십수 년간 그래도 할머니 통장으로 용돈은 따박따박 보냈다는 거다. 지금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가만히 있다가, 딸에게 모욕당하고 얻어맞은 것과 진배없으니, 할머니께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하고 원망스러웠을까. 그래도 할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고모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그리고 연락 한번 없는 딸에게 "여한"을 두지 않으시고 세상을 뜨셨다.
사촌오빠와 고모가 연을 끊은 것이 십여 년이 넘었고, 사촌동생이 고모와 연을 끊은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 일이었다. 결국 사촌동생은 고시공부를 접었고, 전공을 살려 작은 IT 회사를 다니면서 올해 다시 고모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올 설에 고모부와 고종사촌 동생이 할머니를 뵙기 위해 내려온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이 황당한 갈등 구조의 매듭이 이제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설이 지나고 어버이날이 되도록 그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십수 년간 따박따박 통장으로 들어오던 용돈마저 끊겼다. 그 돈이 있으나 없으나 할머니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에게는 그래도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고모가 전하는 안부인사 같았는데, 작은 아들이 할머니 보러 내려간다고 하는 순간, 용돈마저 끊어버리는 고모의 독기를 보면서, 이 관계가 좋게 끝나기는 힘들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혼하겠다고 집을 뛰쳐나간 사촌오빠 부부는 둘이서 알콩달콩 지금까지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 도대체 이혼과 고모와의 절연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 관계는 내가 감히 짐작도 못할 고리인 것 같지만, 어쩌면 사촌오빠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모와 이혼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연이 두 대를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철저한 타자로, 제삼자로 나는 그 갈등의 고리가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매듭이 지어질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할머니의 임종을 계기로, 어쨌거나 고모가 빈소에는 나타났고, 고모와 절연했던 사촌오빠도 빈소에 나타났으니, 독하디 독한 두 모자가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하고, 무언가 서로 느낀 바가 있긴 하겠지.
숙모를 보니 우리가 참 많이 늙은 것 같다고 계속 같은 말만 전화로 되풀이하는 사촌오빠.
사실, 숙모가 아니라, 평생 자기 하고픈대로만 하고 변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고모의 늙은 모습을 보면서, 절연했던 그 세월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한꺼번에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겠지. 그걸 차마 인정할 수 없으니 괜스레 우리 엄마를 그 드라마에 찬조출연시키고 있는 걸 테고.
제발이지, 할머니의 임종을 계기로 이 패밀리 블랙코미디가 제발 끝나길 바랄 뿐이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델몬트 오렌지 주스가 있다. 올해 초에 설 쇤다고 우리 집에 오시면서 할머니께서 가지고 오신 주스다. 이렇게 할머니께서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손녀딸의 일상에 흔적을 남기고 가셨다. 한동안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외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손수 담은 고추장을 보면서 당신의 빈자리를 느꼈었는데, 고추장이 사라지고 나니 이번엔 오렌지 주스다. 유통기한 내의 제품이면 먹어서라도 슬슬 당신을 잊을 텐데,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인지라, 처분하겠다는 결심이 설 때까지 계속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당신을 떠올리겠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일 년에 간신히 네 번을 볼까 말까 했는데
그래도 그녀의 난 자리가 느껴지는 오늘 이 순간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