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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꽃피는 Nov 29. 2020

46세 산모, 출산 하루 만의 퇴원

늙은 초보 엄마 아빠의 기나긴 하루


8월 13일 아침 7시 15분, 나는 엄마가 되었다. 3.2kg, 47cm의 건강한 여아가 내 자식이란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기적같이 정상분만(NSVD)으로 출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도 본격적으로 분만에 들어간 지 2시간 만에 말이다.  46세 초산, 초고령산모인 데다가 높은 BMI 지수, 여러 개의 근종 때문에 자궁근육이 출산 때 아기를 제대로 못 밀어낼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출산 후 컨디션마저 굉장히 양호했다.

임신기간 동안, 여러 가지 자료를 뒤지면서 자연주의 출산을 한 산모가 아기를 낳은 후 30분 뒤에 서서 다니는 장면을 보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니, 저게 대체 가능한 일이야?' - 내가 겪어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정상분만으로 아기를 출산하니, 놀랍게도 회음부 부위를 제외하고는 크게 불편한 부분이 없었다.



조리원 입소 비상사태



폭풍 같은 새벽이 지나고, 무사히 태어난 아기와 함께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했다. 정말이지, 불과 한두 시간 전의 요란했던 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마냥 멀쩡한 몸과, 아직은 낯선 아기와의 만남.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신생아부터 24시간 모자동실 시스템인 병원이었기에, 바로 초보 엄마 아빠인 우리 부부는 아기 돌보기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 모든 평화로움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낯설었다.


아드레날린이 과잉 분비된 나와 남편은 출산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도 피곤한 줄도, 아픈 줄도 몰랐다. 보통은 출산으로 지친 아내 대신에 남편이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돌린다고 하는데, 내 몸이 너무나 멀쩡했기 때문에, 부모님께도, 조리원에도 내가 직접 전화해서 출산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곧 비상사태를 선언하고야 만다.


아기를 무사히 낳았으니 큰 고비를 넘긴 것 아닌가.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별일 아니지만, 그때 나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어쩌면, 병원 퇴원 후 바로 조리원에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초보 부모가 집에서 아기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조리원 입소 날짜가 꼬여버린 것이다.


내가 출산한 대학병원은 정상분만의 경우 초산은 2박 3일, 경산부터는 1박 2일 입원이 원칙이었다. 수가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더 입원을 원하더라도 가차 없이 규정대로 퇴원을 해야만 하는 시스템. 나는 8월 13일에 출산을 했기 때문에 2박 3일 입원을 해 있을 경우 8월 15일(토)에 퇴원을 하게 된다. 8월 16일(일), 임시공휴일인 8월 17일(월)로 이어지는 연휴 한 중간에 퇴원을 하게 될 상황.



조리원은 빨간 날에도 운영을 하니 상관이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조리원 연계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학병원에서의 출산을 선택했고, 대학병원에는 연계 산후조리원이 없었다. 그랬기에 타 병원에서 출산을 한 산모를 자기네 시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병원- 연계 병원 소아과에서 아기의 건강 상태 -특히, 로타 바이러스 감염 여부 -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조리원은 연중무휴로 운영을 하지만, 해당 연계병원은 연휴 때 진료를 보지 않는다. 때문에, 꼼짝없이 병원 퇴원 후 이틀을 집에서 보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슈퍼 울트라 왕초보 엄마 아빠가 무려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집에서 아기를 돌봐야만 한다? 그 당시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기 안는 법도, 기저귀 가는 법도, 수유하는 법도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부모에게는 너무 가혹한 미션이었다.  



출산 하루 만에 퇴원하기



남은 방법은, 대학병원 측에 하루 입원 연장 혹은 이른 퇴원 요청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수가 문제로 인해, 입원 연장은 불가능한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결국, 나의 선택은 이른 퇴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과정에서 내 몸 상태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황당할 따름이다. 당시에야 전혀 아픈 곳 없이 걸어서 돌아다닐 정도였기에 머릿속에는 오직 "조리원 입소 스케줄 정상화"라는 미션 생각뿐이었다.


담당 교수님께서는 일단 나의 요청이 타당한지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일정보다 빠른 검사를 진행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빈혈 수치, 혈압 체크 등 여러 가지 검사를 시간대별로 여러 차례 진행한 후, 하루 빠른 퇴원을 승인받았다.


원래는 2박 3일이 원칙이긴 한데,
아침 이른 시간에 출산한 데다가
검사 수치상 문제가 없어서
내일 바로 퇴원하셔도 무리는 아닐 것 같네요.

이제 조리원 연계병원 소아과 예약 및 받아야 할 검사에 대한 안내, 조리원 입소 스케줄 확인 등의 일을 하나씩 처리해나갈 차례였다.


그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서, 경황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웃겼을 것 같다. 출산 후 3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산모 입에서 나온 요청이 "내일 퇴원하게 해 주세요"였으니 말이다. 진짜 글자 그대로 아직 아기 머리의 핏자국도 마르지 않았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퇴원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모자동실, 지옥 같은 48시간



아침 7시에 출산 후 채 2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 병원이 자랑하는 신생아 24시간 모자동실 시스템이 시작되었다. 다른 병원에서 출산한 엄마들이 신생아실 유리창을 통해 아기를 만나고,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아기를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내 새끼 내가 품을 수 있으니 분명 좋은 시스템이겠지.  분만실에서 나와서 남편이 찍어놓은 아기 사진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바로 아기 침대에 담겨 내 새끼가 병실로 들어왔다.




처음으로 아기를 안았을 때의 느낌은 너무 단단하고 무겁다는 것이었다. 겨우 3.2kg의 아기인데도, 아기의 몸은 쇳덩이처럼 단단하고 묵직했다. 처음이라 무서워서 그랬던 것일까. 뱃속에 있던 내 새끼가 세상 밖으로 나왔고, 그 아이를 안는데 첫 느낌이 "정말 무겁다"라니. 초보 엄마의 부담감과 책임감, 두려움 같은 복합적인 심리가 반영되어 그랬던 것일까......



내 침대 옆, 아기 침대 속의 내 새끼.

아직은 어색한 우리 사이.

내 뱃속에서 10개월간 거주하시던 분이긴 하지만,

저나 나나 서로가 아직은 낯선 사이.


발가락 말고는 나를 닮은 구석이 보이지 않는 낯선 얼굴에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한 데면데면한 모녀가 나란히 누웠다. 물론, 각자의 침대에서. 내 침상에 아기 같이 안고 있다가, 낙상 위험 있다고, 간호사 분께 야단맞고 곧 자기 침대로 돌아가야만 했던 내 새끼.


진짜, 내 유전자는 다 어디로 갔는지!


눈코입 다 남편을 닮았다.


심지어 아기 사진을 본 엄마가 전화로, "니가 임신 중에 박서방 많이 미워했었니? 왜 박서방만 닮았어?"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니, 나의 실망감은 오죽했을까. 누구를 닮아도 사실 상관이야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힘들게 품고 힘들게 낳았으니, 엄마 지분도 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그 상황 속에서 내게 먹을거리를 배달한 남편은 옷도 갈아 입고 샤워도 할 겸 집으로 사라졌다. 병원과 집이 차로 5분 거리라서, 그 이후로도 남편은 겨우 1박 2일의 입원기간이었지만, 뻔질나게 집을 들락거렸다.


두 모녀만이 어색하게 분만실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드디어 병실에 자리가 났다며 이동 사인이 떨어졌다. 꼭 써먹으려고 할 때, 없는 남편 때문에 혼자서 짐을 다시 싸서 이동을 해야만 했다. 병실이 없어 지난밤 산통으로 몸을 비틀었던 분만실에 계속 머물렀었는데, 이제 임시 살림을 정리하고 본격 병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 봤자 다음날 퇴원하지만 말이다.  


3인실은 다른 일반 병원의 병실에 비해 상당히 넓었다. 모자동실을 해야 하기에 아기침대 놓을 공간을 염두에 둔 배치였던 것 같다.


산모 침대 3개, 보호자용 간이침대 3개, 모자동실하는 신생아들이 누워있는 아기 트롤리 3개. 그리고 그 침대의 주인 9명이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분은 제왕절개 수술을 한 경산모인 것 같았다. 아기를 안고 달래는 엄빠의 손놀림이 숙련자의 그것인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날 밤, 초보 엄빠 때문에 이 숙련자분들께서는 잠을 설치게 된다.






2시간마다 간호사가 분유를 타서 가져다주었다. 신생아의 위장은 호두알만 한 크기라고 들어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분유 5밀리, 다음번엔 10밀리를 먹이는 식으로 조금씩 양을 늘려갔다. 아기는 게걸스러울 정도로 잘 먹었고, 하룻밤 만에 25밀리까지 양이 늘은 상태로 퇴원을 했다.


그런데, 3인실이다 보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건들이 벌어지지 뭔가. 우리 아기의 수유시간과 해당 병실의 다른 아기들의 수유 타임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밤 11시에 병실 전체등은 소등했지만, 아기들 수유 시간마다 이번엔 이 침대, 다음번엔 저 침대, 이런 식으로 돌아가며 불이 켜지고, 이번엔 이 집 아기가 울어대고, 다음번엔 저 집 아기가 울어댔다. 조용한 시간이 30분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황. 정말이지 3인실 모자동실 하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병원의 1인실은 가족분만실도 겸하고 있어서 1박 비용이 3인실에 비해 6배가량 비쌌다. 그러니 극한 난이도의 모자동실이라고 하더라도 다들 3인실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밤새 미친 듯이 울어댄  아기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였다.


어차피 신생아가 우는 이유는 뻔하기 않은가.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축축하거나, 온도가 맞지 않거나, 아프거나 정도가 전부인데, 그 울음 하나를 못 그치게 하니,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분들께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남편과 나는 부모가 된 지 채 24시간도 되지 못한 초보였고, 그것이 우리의 문제였다. 나도 아기가 우는 이유가 아주 약간 궁금하긴 했지만, 전적으로 남편에게 아기 돌보기를 맡긴 채 선 잠을 자려고 애를 썼다. 다음날 조리원에서 24시간 모자동실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연계 병원 소아과에서 검사를 하고 입소한 후에도, 24시간 내가 아기를 데리고 머물면서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신생아실에 들어갈 수 있는 "잔인한" 시스템. 나는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에너지를 비축해둬야만 했다.


결국 새벽 4시쯤에, 보다 못한 간호사가 아기를 침대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성인 6명의 잠을 빼앗아간 원흉이 소변 기저귀라는 어이없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른 침상에 방해가 될까 싶어 남편은 우리 침상의 불을 켜지 않고 휴대폰 후레시 불빛에 의지해 아기를 돌봤다. 응가의 경우 육안으로 쉽게 구분이 가능했는데, 쉬야의 경우 흐린 불빛으로는 알아채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번을 기저귀를 풀고 폰으로 비춰보고 다시 싸고, 안고 어르기를 반복했지만 원인을 알아내지 못할 수밖에. 덕분에 6명의 어른들은 제대로 잠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어설프게 배려를 하려다 생긴 일이니  웃플 수밖에.


기저귀를 갈고 나자 언제 울어댔냐며 꿀잠을 자는 아기. 그런 아이를 놔둔  남편은 바람을 쐬겠노라며 나갔다. 많이 어이없고 지쳤었나 보다. 그때가 새벽 5. 덕분에 나는 아침 7시에 남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2시간을 간이의자에 앉아 잠자는 아기를 바라보며 있었야만 했다. 침대에서는 아기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누워있다가 울면서 신호를 주면 내려가 살펴봐도 됐을텐데,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서툴기 마련이다.


그렇게 고통으로 가득 찬 입원 첫날이자 마지막 날 밤이 지나갔다.


이제 드디어 퇴원이다.


드디어라고 말하기에는, 겨우 1박이라는 짧은 입원기간이었지만, 기나긴 밤이었다. 6명의 어른과 3명의 아기가 빚어내는 환장의 콜라보를 하루 밤 더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 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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