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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pc민코치 Mar 17. 2020

삶 속에서 흘려보냈던 메세지들

9살 때 일어난 일   

  

 9살에 철이 들었다. 그 나이에 맞게 어리광도 부려봤어야 했는데 그 좋은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어렸던 9살 봄날에 일어난 한 사건이 내 삶을 참 오랫동안 지배했기 때문이다.

 2학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에 재미가 붙었다. 아침저녁으로 친구들과 공을 찼다. 이른 나이에 글자를 깨우쳤던 덕분에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마냥 뛰어놀면서 밝게 크면 그만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공 차러 갈 생각에 신난 봄날 아침이었고, 가방을 들쳐 메고 크고 씩씩한 목소리로 학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부모님은 이미 출근을 한 시간이었고, 함께 살던 외할머니께서 항상 나를 배웅해주셨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갑자기 할머니가 웃으면서 한마디 하셨다.    

 

“우리 복기, 이제 학교 잘 가네. 어려서는 지 에미를 그렇게 울리더니.”     


 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후로, 한 번도 아침에 어머니가 집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엄마를 울렸다고? 그래서 다시 여쭤봤다.    

 

“할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왜 저 때문에 울어요?”     


“너 어릴 적에, 그러니까 아기 때 이야기야. 엄마 학교 가지 말라고 엄마한테 매달려서 네가 그렇게 심하게 울었어. 죽는다고 난리를 쳤지. 그래서 너 떼어 놓느라고 할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그러고 나면 문 열고 나가면서 네 에미가 맨날 울었어. 눈이 커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많이 울었지.”   

  

 9살 나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그런데 엄마가 맨날 울었다. 그것도 나 때문에. 그 어린 녀석에 내 눈앞에 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9살짜리 어린 사내 녀석의 마음에 한 가지 다짐이 피어났다.     


‘앞으로는 엄마가 나 때문에 울지 않게 해야지.’     


 그 다짐 하나가 참 오랫동안 삶을 좌우했다. 예를 들면, 어머니는 한 번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면 엄마가 슬퍼할 것 같았다. 공부 자체에 대한 흥미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잘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가 좋아하셨기 때문이었다. 기쁘게 해 드리면 울지 않으시겠지. 아주 간단하게 계산이 끝났다.


 사춘기도 없었다. 주변 친구들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내는 동안 나는 옆에서 그 친구들을 비웃었다. 그 친구들이 그저 어리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해봐야 남는 것은 없다고 여겼다. 그저 괜히 부모님 마음만 아프게 하는 행동이라고 치부해버렸다. 학교에서 인정받는 모범생으로 살면 딱히 고민할 것은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문과로 갈지 이과로 갈지를 결정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내 성향이 문과로 진학하는 것이 맞는다고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이과로 가야 먹고사는 고민을 덜하게 될 거라고 하셨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이과로 갔고, 공대에 입학했다.

 공대로 진학한 것도 간단한 이유였다. 그 당시 내가 진학한 학교는 공학부 입학생 약 900명에게 2학년 2학기에 전공을 결정하도록 했다. 공통과목을 2학년 1학기까지 배우면 된다는 것이었다. 수능 점수가 나올 때까지도 무슨 전공을 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보니 그런 선택 조건이 매력적이었다. 그 이유로 나는 가려는 대학을 결정했고, 전공을 선택하는 결정도 나중으로 미룰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느 날 느닷없이 사막 한가운데서 삶의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대학과 전공을 결정해야 했던 그 순간에 더 깊이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 내가 삶을 내 의지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첫 번째 징후였다. 그때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마 그때가 처음으로 내 삶을 마주할 기회였는데 놓쳐버린 것 같다. 왜 그때 웅크리고 앉아서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것을 더 고민하지 못했던 걸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했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을 크게 후회하지는 않는다. 거의 모든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만 특별히 그 답을 얻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통과의례처럼 놓쳐버리는 터닝포인트였을 따름이었다. 어쩌면 놓칠 수밖에 없는 타이밍에 찾아온 삶을 마주할 기회였다고 나 할까.   

  

첫사랑을 잃고 난 후     


 대학교 1학년 말.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생겼고 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삶의 목표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줘야겠다는 것.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햇수로 6년간 이어졌다. 제일 친한 친구이자 제일 소중한 연인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거의 함께 있었다. 학교 공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리 시험에서는 100점 만점에 4점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부모님도 그러려니 해주셨다. 나중에 때 되면 정신 차리겠지. 그냥 그렇게 생각해 주셨던 것 같다.

 전공이 결정되고 3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나서 휴학했다. 군 복무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놀기에 바빴다. 오전에는 PC방에서 게임하고 낮에는 농구하고 저녁에는 여자 친구 만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3학년 1학기 학점이 1.8이었다. 더 다녀봐야 등록금만 축내는 수준, 딱 그만큼이었다.

 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여자 친구는 지쳐가고 있었다. 도무지 이 남자에게는 미래가 없어 보였던 듯하다. 책을 펴는 꼴을 보지 못한 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그렇게 첫사랑이 떠나고 나서 완전히 무너졌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던 나머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위에서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토했다. 자연스럽게 고기를 멀리하게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집 앞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달리기의 슬로건도 명확했다. 슬픔이 오기 전에 달리자.

 운동장을 한 30-40바퀴 돌고 나면 지쳐서 드러누웠다. 하지만 일어나서 조금 더 달려야 했다. 지쳐서 드러누웠다고 곧바로 집에 가서 잠을 청하면 다리에 쥐가 났으니까. 그렇게 거의 매일을 한 50바퀴 이상 운동장을 뛰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후배들이 연인과 헤어져서 잠을 못 잔다고 하면 항상 그런 조언을 했다.   

   

“잠이 안 오면 나가서 뛰어. 이러다 죽겠다 싶으면 마무리 달리기 조금 더 하고 스트레칭 한 다음에 집에 와서 누워봐. 몸이 얼마나 정직한지 알게 될 거야. 기절한 듯 자게 된다. 내가 장담할게.”     


 술도 끊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집이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14층이었다. 행여나 술김에 뛰어내리면 세상없을 불효자가 될 테니까. 그렇게 기름진 음식과 술을 안 마시고 달리기만 하다 보니 체중은 6개월도 안돼서 20kg이 넘게 빠졌다.

 그때 달리기를 하면서 어떻게 해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를 잘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나는 항상 잘해주려고, 더 챙겨주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썼는데 정작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 차이를 어떻게 깨달아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생기게 된 걸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자기가 없어져야 이 남자가 정신을 차릴 거라는 생각으로 떠나가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내 삶을 돌보는 일을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마냥 상대를 미워하기만 했던 내가 참 어렸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다 삶의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에만 해볼 수 있는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 배운 것들이 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리던 순간에 내가 앞으로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도 함께 고민했어야 했다. 그저 빨리 복학해서 학점 관리하고 취직해서 돈 벌어서 자립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이 아쉽다. 고개를 들어서 내가 있는 숲을 한 번 돌아봤어야 했는데 그저 눈앞의 나무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던 셈이다.     


첫 아이가 집으로 오던 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채 전공에 대한 전문성을 조금 더 키우고 싶어서 대학원에 입학했다. 잠시나마 공부에 흥미를 느꼈다. 잠시 유학을 가는 것에 대한 고민도 했지만 유학비를 마련할만한 집안 사정이 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절실히 가고 싶어 했다면 길이 있었겠지만, 치열하게 그 길을 찾아볼 정도로 바라지는 않았다.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는데 유학은 굳이 뭐하러 가느냐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석사를 마치고 취직했다. 처음에는 우쭐했다. 내 손으로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생겼으니까. 운동장을 수도 없이 뛰면서 바라던 자립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곧 가정을 이루었다. 큰 부자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남에게 폐 끼치면서 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결국 ‘남’의 앞에서 당당할 조건일 뿐, ‘나 자신’에게는 당당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첫 아이가 태어났다. 산후 조리원에 머물던 기간이 지난 후에 나는 벽을 마주한 것 마냥 삶이 던지는 질문을 마주했다. 이전까지는 삶이 보내주는 신호들을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정면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정말 생생하다.     

 3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던 때는 1월 초였다. 서둘러 보일러를 틀었지만 오랜 기간 냉골이었던 방은 따뜻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더 빠르게 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집의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방을 돌아와 보니 아이에게 싸매 둔 포대기가 풀어져 있었다. 그리고 태어난 지 갓 3주밖에 안된 딸아이가 턱을 덜덜 떨면서 추워하고 있었다.

 그 순간의 미안한 감정이란 그 크기를 잴 엄두도 못 낼 만큼이었다. 얼른 아기를 안아 들고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다른 이야기도 이어졌다.     


 “아가야, 엄마 아빠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단다. 둘이 같은 회사를 다니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출퇴근도 같이 하고 있어. 물론 앞으로 한동안은 엄마가 네 곁에 있어야 해서 아빠 혼자 다니겠지만, 그래도 속상해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 예쁜 아가를 돌보기 위해서 그런 거니까. 항상 엄마 아빠가 우리 가족이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거고, 일도 열심히 해서 돈도 열심히 벌 거야. 우리 아가 멋지게 키워주고 싶거든. 그러니까 아가야 너도 나중에 자라서 어른이 되면, 엄마 아빠처럼......”     


 엄마 아빠처럼 열심히 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차마 그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딸아이에게 과연 나처럼 살라고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나처럼 성장하는 것을 권해줄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묵직한 질문에 목이 막혔다.     

 그렇게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덩그러니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살아온 인생을 딸아이에게 권해주지 못한 것은 방금 발생한 현실이었는데도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그 말을 못 하는 거지? 

 머릿속에서 지난 삶이 빠르게 스쳐갔다. 나처럼 살라는 말을 못 하게 된 것은 어느 지점에서 잘못했기 때문인지 떠올려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 번도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적이 없었다.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잘해왔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냥 딱 그만큼이었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에게조차 권하지 못하는 삶일 뿐이었다. 대체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답이 없었다. 계산으로 뚝딱 정답을 맞히는 것이 익숙한 공대생에게 정말 힘든 문제였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 두지 않으면 언제가 또 올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당장 답을 낼 방법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놔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답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아픔도 무디어졌다. 아이가 커가는 기쁨은 그런 고민을 다 미뤄두게 해 주었다. 그때쯤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게 되는 것이었구나.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답을 내지 못하고 서성이다가 결국 삶이 시키는 대로 가게 되는 것이었구나.     

 그럼 나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면 되는 것이겠지. 그냥 열심히 회사 생활하면서 돈 모아 집 사고 차사고하면 되는 것이겠지. 남들보다 조금만 더 잘하는 수준으로 해내면 다시 예전처럼 적당히 인정받으면서 노후 준비를 차곡차곡하면 내 삶 속의 숙제는 다 해내는 것이겠지. 그렇게 또 합리화를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삶은 그런 나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 순간 마주한 곳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사막이었고 길을 잃은 날을 기점으로 답을 찾을 때까지 다시는 멈추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모든 가족들을 한국에 두고 혼자 지내야 했으니, 그 답을 찾기에 어쩌면 최적의 환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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