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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유목민 Jun 05. 2024

남편이 떠났다

어제 남편이 제주를 떠났다.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갔다. 삼천포로 가는 오후 3시 배를 타고 갔으니 밤 9시경 그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어젯밤 9시도 안되어 아이와 잠이 들었기에 잘 도착하면 문자 하나 남기라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기에 아침에 일어나 잘 도착했다는 문자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할 말은 없다. 왜 잘 도착했다고 연락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분명 "잘 까봐" 로 대답할터이니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오늘 오전 전화해 "나 어제 잘 도착했어"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게 맞다.


떠나기 전날 오전에 잠시 아이 문제로 언쟁을 벌인일이 있어서 속으로 남편이 빨리 육지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은 항상,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1년간 육아휴직한 남편이 있어서 나는 육체적으로는 너무 편했으나 다른 측면으로는 '하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남편이 있어서 좋았던 점을 먼저 써보기로 했다.


첫째, 모든 집안일을 남편이 도맡아했다. 예전같으면 상상하지도 못했을 일을, 남편이 해냈다. 빨래, 설것이, 재활용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비우기, 청소, 심지어 라면도 맛없게 끓이던 그가 요리도 섭렵했다. (1-2개월 빠짝이긴 하지만...) 남편의 요리 중 우삼겹 덮밥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그 요리를 해달라고 하면 남편은 한숨을 쉬며 해주고, 본인은 먹지 않는다. (그러구보니 마지막으로 그 요리를 해 놓고 가라고 할 걸 그랬다...)


둘째, 아이의 모든 픽업을 담당했다. 사는 곳은 시내이기는 하지만 축구, 피아노, 합창, 체스 학원이 모두 라이딩이 필요한 곳이다. (피아노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서 다음주부터 혼자 걸어가보기로 아이와 합의했다) 토요일은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하는 합창 3시간, 체스 1시간, 축구 1시간 30분의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돌아오면 오후 5시인데, 나는 그때 내 일을 보거나 휴식을 한다. 이제 그 꿀여유는 없어지고, 내가 모두 해야한다. 


셋째, 우유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줬다. 나의 최애 음료는 라떼이다. 오전 한 잔, 오후 한 잔이다. 아이에게 홈 알바를 시킨 이후로 오전 라떼는 아이가 타 주는데, 우유가 항상 대기 중이다. 한 번도 끊긴적이 없다. 만약 우유가 없으면 새벽이든 저녁이든 집 앞 마트로에서 사서 채워주었다. 어제 오후에 남편이 떠난 후 우유가 딱 떨어졌는데, 그게 가장 아쉬웠다. 


넷째, 함께 달리기를 했다. 남편은 1년 내내 개인적으로는 정말 놀랍게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다짐했던 살도 빼지 못했고, 투자공부도 설렁설렁했고, 실행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측면이 내가 힘들었던 측면이었을 듯 하다.) 황금같이 나에게 주어진 미니은퇴 1년의 기간을 어떻게 미래의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지? 그 시간을 내가 사고 싶었다. 완벽할 수 없는 결혼생활에서 이렇게 반대되는 면이 나와 남편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이룬게 있다면 마라톤 10km 완주를 성공했다는 것이다. 달리기를 시작하며 남편에게 동네 어르신 가르치듯 런데이 앱을 깔아줬다. 나름 신기해하며 매일 운동을 하던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다! 슬쩍 "가족의 추억을 위해서 복직 전 가족 마라톤에 나가보는 건 어떨까?"라고 기대하지 않고 말했는데 바로 낚였다. 제주국제관광마라톤 대회에 단체로 등록해서 티셔츠를 받고 생전 처음 마라톤에 출전했다. 따로 달리기는 했지만 가족이 모두 10km 를 완주했다. (나는 1시간 11분, 아이는 1시간 27분, 남편은 그 중간 언저리..)

결혼 후 겹치는 취미도 없었는데, 함께 달리기를 하다니. 놀라웠다. 남편에게도 이 기억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던듯하다. 그 이후에 아직도 열심히 달린다. 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것에도 흥미없었는데, 달리기라는 게 성취가 대단하더라고..." 친구에게 하는 고백을 들었다. 


다섯째, 유럽 캠핑카여행이라는 추억을 만들었다. 결혼 후 12년 간의 세월을 놓고 봤을 때 남편이 최고로 최선을 다했던 순간이었다. 같은 사람 맞나? 할 정도로 나와의 언쟁을 슬기롭게 피해가고 바로 사과했다. 유럽여행의 숨은 공로자는 바로 남편이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제자리이긴하지만 물어보고 싶다. "남편, 유럽 여행했을 때 왜 그렇게 나한테 잘 해줬어?"


아이와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듯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숙제를 다 마치고 마침 배달 온 배드민턴 공을 가지고 학교로 배드민턴을 치러가자고 했다. 내가 가장 아쉬운 순간이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을 보냈을텐데.. 어제 유난히 피곤한 몸뚱아리를 이끌고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와 배드민턴을 치는데, '하아.... 얘랑 과연 한 두번 핑퐁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바람도 불어서 공이  다른 방향으로 갔다. 바람 핑계를 대며 집에 가자고 했는데 아이가 울것같아서 그냥 다시 쳐보자고 했다. 저쪽이 바람이 덜 부는 것 같다고, 일은 모르는 거라며 아이가 나를 격려하며 다른쪽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아이는 꽤 잘 해냈다. "이야! 많이 늘었네. 이제 함께 배드민턴 칠만 하겠는데?"라며 격려해줬다. 처음 몇 번 치고, 본인은 배드민턴은 못치는 것 같다고 좌절하는 아이에게 "처음하는 데 잘 하는 사람이 어딨어. 계속 연습해야 느는거지"라고 말해주길 잘했다. 아이에게 하는 말이지만,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1년의 일상이 끝났고, 원래의 일상이 찾아왔다. 나만의 시간은 줄어들겠지만 아이와 교감하는 시간은 늘어날테니 그걸로 좋다. 


남편은 다시 여행객처럼 제주에 들리겠지, 목요일쯤되면 남편을 기다릴테고, 토요일쯤 되면 한숨을 쉬며 남편이 육지에 돌아가는 순간을 다시 기다리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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