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눈부셔."
또 아침이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하루가 지나있는 기분이다. 눈을 감은채 어제를 곱씹어본다.
답을 찾으러 간 길에 또 다른 문제를 받아 들고 와버렸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스치던 생각에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어머니..라고?"
엄마를 찾으며 머릿속으로 읊조린 혼잣말에 짐짓 놀라버렸다. 지난 며칠 어른의 몸으로 어른 대우를 받으며 사람들 속에 있었다고 말투도 어느새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생각마저 바뀌고 있었다는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어머니라니..!!
어머니라는 단어는 따로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 속에는 엄마라는 단어가 유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단어에 이전과는 다른 혼란스러움이 일렁거렸다.
어쩌면.. 정말 난 어른일지도... 몰라.
모든 순간이 나를 하나로 표현했다.
조금씩 다른 말로 달리 불리긴 했지만 그 의미는 결국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어른'.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나를 기억하는 많은 곳에 존재하는 증거들은 하나같이 그리 말을 한다. 산처럼 크고 가끔은 두렵고 때로는 세상 무엇보다 든든하고 때로는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따뜻한 존재라고 여겼던, '어른'이라고 말이다.
문득 자전거를 배웠을 때가 떠오른다.
아빠가 페달을 밟는 것만 가르쳐주고는 잡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무턱대고 밟아보라던 그 순간이 스치고 지났다.
그리고 지금의 난 그때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생각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이 몸이 어느새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지경이 되어있다. 어쩌면 그처럼 몸이 알아서 찾아 줄지 모른다. 하나씩 하나씩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표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방금 전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자락에 어머니라는 표현이 불쑥 나오듯 몸이 익숙한 행동과 표현들이 나올 테지.
잘려나간 기억을 찾는 것을 잠시 멈추고 눈에 보이는 힌트를 관찰해 보면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노트를 꺼내든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떠올랐음
자전거를 잘 탐
아침에 생각보다 일찍 일어남
잠이 깨면 눈을 잠시 감고 있는 버릇이 있는 듯함
김치찌개를 좋아함, 왠지 만들면 잘 만들 것 같기도 함
면도깎이를 사용할 줄 앎
그리고.. 그리고.. 이렇게 하나씩 적어 내려가다 보니 뭔지 모르게 마음이 진정된다. 아직은 어른인지 아닌지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지만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낯선 어른 같은 단어들과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 속에 어른의 흔적이 배어 나온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아닌 것은 아니다.
유치원 때 친하게 지냈던 자영이가 다른 학교로 배정받고 떨어져 지낸 지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얼굴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렇다고 그 친구랑 안 친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 내 기억 속에 없다고 몸이 기억하는 이 행동들이 내가 하는 게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지 않는 기억을 머리 싸매고 기억해내려 해도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면 그냥 지켜볼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솔직히 지금은 그것도 최고로 멋진 계획인 것 같다는 좀 우쭐한 마음이 한켠 드는 것도 사실이다. 꽤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짐짓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엄마한테 빨리 이 생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자랑하고픈 맘에 문득 잠시 잊고 있었던 엄마를 찾는다.
이렇게 멋진 생각을 했었다는 걸 까먹기 전에 빨리 엄마한테 자랑해야 하는데 도무지 엄마가 보이질 않는다.
'대체 어딜 가신거지? 빨리 이 멋진 계획을 어떻게 하게 됐는지 쫌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고 얘기해줘야 하는데'
조바심이 생긴다. 그때 현관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비닐소리와 함께 달깍 문이 열렸다. 엄마다!!
냅다 현관으로 뛰어가 놀란 토끼눈이 된 엄마에게 쉴 새 없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