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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세상 속 숨은 어른 찾기

어? 어~ 어!!

by 글린더

민영이다!

전화 너머 민영이 들려줄 이야기는 내 세상이 아닌 듯 재미있다. 낯선데 익숙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전화기가 뜨끈뜨끈하다.

이제는 나도 꽤 많은 일상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알게 된 사실들과 실수들을 이야기할 때면 민영은 까르르 전화 너머로 크게 웃어댔다. 그럴 때면 민영의 표정이 눈에 선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더 웃게 해주고 싶다'

민영의 웃는 소리는 엄마와는 다른 따뜻함이 든다.

왠지 모를 힘과 용기가 생겨,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민영에게도 힘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민영을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다.

민영에게 잘 보이고픈 마음에 며칠 버스 타는 연습을 하며 엄마 없이 혼자 다니는 시간을 늘려갔다. 아무리 엄마가 좋아도 엄마랑 같이 다니는 모습을 민영에게 보이는 건 좀 부끄러웠다. 불안해하는 엄마를 뒤로하며 당당하게 버스에 오르니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겨우 한 코스 지났을 뿐인데 심장이 콩닥거리고 손에 땀이 났다. 혹시라도 내려야 하는 곳을 놓칠까 눈은 승강장 이름을 뚫어져라보고 귀는 방송에 집중했다.


도착!


승강장에 예쁜 흰색 원피스를 입은 민영이 보인다.



"민영아, 꼭 이래야겠니?"

"다시 만나서 어쩌겠다고, 그렇게 힘들어놓고.."


민영은 가족의 걱정을 뒤로 한채 방으로 들어선다.

꼭 잡은 손잡이를 굳게 잠그고 눈을 감아버린다.

'내 인생이야.. 내 결정이라고..'

확신 없는 민영의 마음만큼 맥없이 주저앉는 두 다리가 야속하다. 가족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시간 오영을 기다리며 흘린 눈물과 미쳐 지낸 모습을 가족들은 곁에서 지켜봤으니 말리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오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연약하고도 순수함 그 자체였다. 그런 그의 눈을 보고 있자면 차마 손을 뿌리칠 수가 없다.

그의 기억이 돌아와 이전의 삶으로, 다시 지옥불로 걸어 들어간다 해도 지금은 놓을 수가 없다.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벽을 잡고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간다.


그 옛날 오영이 사준 하얀 원피스를 말없이 바라본다.

어릴 때 산 옷이라 지금은 잘 안 입는 스타일의 치마다. 옷을 손에 쥐고 결심이라도 한 듯 무심히 걸쳐 입는다.


15 년 전 연애를 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오영은 카페에서 민영을 기다리며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다.

미리 주문해 둔 음료를 받아 들고 돌아서던 오영은 때마침 도착한 민영의 장난에 깜짝 놀라 음료를 와장창 쏟아버렸다. 그 바람에 입고 있던 원피스에 커피가 쏟아져 얼룩이 생겼다. 오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민영은 괜찮다 말했지만 옷이 상해버려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민영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오영이 갑자기 뛰쳐나가 한참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며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민영은 그 모습에 애써 참고 있던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화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순간 그가 내민 종이가방엔 일전에 스치듯 지나며 말한 보세가게의 디피 된 하얀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마침 지나가던 작은 보세가게에 디피 된 하얀 원피스를 보며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담에 나한테 미안하면 이거 사들고 뛰어오면 다 용서해 줄게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소한 순간들의 작은 조각 하나까지도 기억해 내는 사람.

그날의 추억이 떠올라 살짝 눈물을 훔치다 민영은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며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젠 내가 기억해 줄게요!"


그가 잃어버린 기억 속 시간들을 찾을 때까지 아니, 설령 찾지 못한다 해도 오영의 옆에서 그의 기억 조각을 새로이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가족들의 만류를 뒤로한 채 당당한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민영의 눈에 익숙한 미소가 보인다.

오영이 하얀 원피스를 사들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뛰어온 그날과 같은 환한 미소를 띠며 창너머의 민영을 보고 있다.

민영은 그런 오영에게 세상 가장 따뜻하고 안심되는 미소로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여기에요 오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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