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흔적
멈춤.
모든 것이 멈춰있다.
손 때 묻은 장난감, 색 바랜 노트에 시간이 녹아있다.
오랜 추억 속 빛바랜 그 무언가가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이끄는 느낌이다. 낯선데 가슴 한쪽이 콕콕.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려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멈춰진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들 기억나지 않는 추억이 생각날 리 만무했다. 그저 타인의 추억을 들여다보듯 덤덤하게 훑다 문득문득 전해지는 아픔에 다시금 멈춰 서길 반복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멍하니 둘러보다 어느새 어둑해진 창이 방안을 한층 더 어둡게 만들었다.
'전기.. 불을 켜야.. ' 더듬더듬 어두운 벽에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켠 순간 번쩍하고 스치듯 기억이 떠오른다.
"이건 아니야!! 이건 말이 안 돼!! 이럴 순.. 없다고..!!!"
눈물에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로 오열하는 민영의 모습이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이 아파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뭐지? 이 기억은..?'
알 수 없는 기억과 함께 쏟아지는 눈물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더 복받쳐 올라오는 감정이 자꾸만 울컥울컥 한다.
그녀의 오열하는 모습은.. 아니 다시 만난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분명 그 모습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의 기억일 터였다.
분명 원망의 눈빛이었다.
그 눈물의 방향은 오영을 향한 것이었다.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만으로도 느껴지는 아픔이었다. 민영의 작은 어깨에 짐을 얹고 싶지 않아 다시 찾은 이곳에서 그녀의 눈물을 발견했다.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조각임에 틀림없었을 어느 시간 중 한 조각을 찾았다.
다음을 기억해 내는 것이 무서워진다.
'감당할 수 있을까..'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꽈악 끌어안는다. 이렇게 다리라도 부서지면 핑계 삼아 더 걸을 수 없을 테니.. 이런 생각이 들자 더욱더 기억을 찾는 게 무서워졌다.
"또... 도망칠 거야? 그때처럼.. 또.. 사라질 거야?"
어느새 눈물을 멈춘 민영이 오영을 바라보며 원망하듯 쳐다본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민영의 화난 표정에 오영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 그 자리서 양손에 주먹을 꽉 쥐고는 고개를 힘차게 좌우로 저었다. "아니! 도망치지 않아" 그렇게 소리치며 원망하듯 바라보던 민영을 바라보았다.
민영을 다시 실망시킬 수는 없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다시 찾은 아파트였다. 이대로 무섭다고 물러서기엔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닦으며 민영을 다시 쳐다보던 오영의 눈앞에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민영은 없었다.
"민.. 영아?" 어리둥절함도 잠시 이렇게 눈앞에서 민영을 잃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 온다.
'지켜야 한다.. 지켜야 해.. '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진짜 민영이 저렇게 무섭게 노려볼 리가 없다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공기가 다시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