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것일 뿐 멈춘게 아니야
민영이는 웃는 게 참 예쁘다.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서운 것도 안심이 되고 왠지 모를 용기도 생긴다.
더 웃게 해 줘야지, 눈물 나게 하는 놈은 다 때려줘야지, 지켜주고픈 마음이 세상 그녀를 위해 못할 게 없을 것만 같은 막연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무서울 게 없었다.
그렇게 지금 가장 무서운 현실에 겁 없이 혼자 부딪혀 보리라 큰맘 먹고 왔는데..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상상조차 못 한 짧은 기억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민영'이었고 그다음 마주한 환상은 '나를 원망하는 민영'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심한 패닉이 왔지만 오영은 다시 일어났다. 다시 두 다리에 힘 꽉 주고 서서 두 눈을 부릅 떠본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울지 않으려 파르르 떨린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본다.
낡은 장난감, 손 때 묻은 노트.
노트를 집어 들고는 잡히는 페이지를 펼쳐 읽어본다. 마치 그 속에 숨은 단서라도 있는 것처럼 짐짓 탐정처럼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영어단어들이 빼곡한 영어 노트였다.
'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군' 노트를 서둘러 덮고는 장난감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다. 어린아이 손에 꼭 맞을 앙증맞은 장난감은 오영의 큰 손아래 쏙 들어가 한층 더 작고 귀여웠다..'누구 거였을까..?'
오영은 무서움을 떨쳐내려 더욱 탐정역할에 집중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만져가며 짚어가며 생각나지 않는 기억의 골짜기를 파고 또 파내려 간다. 언젠가는 무언가는 찾고 말 거라는 심정으로.
그러다 오래된 앨범이 손에 들어온다.
그 속엔 어린 민영과 낯선 얼굴의 오영이 웃고 있는 사진들로 가득했다. 간혹 화난 듯한 표정의 민영이 보이긴 했지만 아까본 환영의 얼굴처럼 무서운 표정은 아니었다. 필시 오영이 뭔가 건드렸을 테지 사진 속 민영의 모습은 표정은 화났지만 그 속에 따뜻함은 그대로 느껴졌다. 결혼식장에서의 민영은 대체 무슨 연유인지 화장이 다 지워질 만큼 또 울고 있었다. 결혼하기 싫은데 하는 결혼인가 오해할 만큼 많이 운 표정이다. 그 옆엔 멋쩍은 표정의 오영이 허둥대는 사진이 가득하다. 언제 울었냐는 듯 화장 지워진 얼굴로 환하게 팔짱 끼고 찍은 사진, 화장을 지우다만 얼굴로 얼굴만 한 햄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있는 사진, 어쩌다 다쳤는지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배시시 웃는 사진 다양한 미소가 가득한 사진첩을 한참 보고 있으니 오영의 얼굴도 미소가 번져 민영의 표정 하나하나에 따라 울고 웃는다.
참 예쁜 사람.
민영은 웃어도 울어도 참 예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앨범 속 시간의 흐름이 어느 순간 멈춰있지만 그 이후에도 지금의 민영처럼 여러 예쁜 모습들이 있었을게 틀림없었다.
슬피 울었어도 아프게 울었어도 지금처럼 다시 예쁘게 웃는 사람이다. 민영은 웃는 게 참 예뻐 주변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오영은 생각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모르겠는 걸 찾아 낸들 문제를 해결할 힘은 있을까? 사진만 봐도 여러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고 나도 이렇게 튼튼하고. 어쨌든 다 지나가는 거란 거잖아. 영원하지 않은 거야!
지금부터 계속 웃을 일을 더 많이 만들어줄 거야. 옛날보다 더 예쁘게 웃는 사진들을 더 많이 채워주면 되지! 내가 더 많이 웃게 해 줄 거야.' 앨범을 지나 오영의 이름이 있는 책을 집어든다. 하나도 모르겠는 말들이 가득한 책을 한 참 읽고 있다 보니 다음이 자연스럽게 추측이 되고 어려운 문제들이 풀어진다. 머리는 이해가 안 되는데 손이 문제를 풀어내려 가는 느낌이다. 끊어진 기억 속 이어진 기억들이 몸 곳곳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묘한 느낌이 들지만 싫지만은 않다. 어려울 것만 같던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배워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올라온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간다.
여러 시간들을 지나 오영이 문을 열고 나오니 어느새 아파트 앞은 아침이 밝아 햇빛이 눈이 부시다.
아침이 되었다.
오영의 왼손엔 작은 낡은 장난감이 꼭 쥐여있었다.
그리고 어깨엔 카메라와 읽다만 몇 개의 책과 노트북이 든 가방이 걸려있다.
오영은 문을 닫으며 작은 소리로 이야기한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