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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다른 오늘

오영, 일어서다

by 글린더

"민영아, 나 이제 일을 해보려고 해"


어안이 벙벙한 민영의 표정이 귀여웠다. 그 모습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담아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민영이 입을 뗀다.

"갑자기 일이라니? 무슨 일? 기억이라도 돌아온 거야?"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표정에서 민영의 복잡한 마음이 들리는 듯하다.

"사진 좀 그만 찍고, 무슨 말이냐니까? 응..?"

물색없이 당황스러운 한마디를 던져두고는 안 그래도 황당한 사람 앞에 두고 계속 사진을 찍어대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민영은 이내 두려움과 불안함이 가득한 표정에서 짜증과 분노가 차오르려 하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리곤 이내 아차 싶었는지 표정이 누그러지며 한층 상냥한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일을 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어떤 하고 싶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잠시였지만 민영의 화난 표정이 스치는 순간 지난 아파트에서 본 민영의 환영이 잠시 겹쳐 보였다.

'아.. 민영이 화내면 진짜 무서울 수도 있겠다.. 히잉.. 무서운데.. ' 오영은 잠시 셔터를 누르던 손을 멈추고 민영을 바라본다.

"뭐든 해보려고. 하다 보면 뭐라도 기억이 나겠지. 몸이 기억할 수도 있고, 몰랐던 적성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애꿎은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며 오영은 시선을 떨군다. 방금 찍은 사진을 돌려보며 카메라 속 민영만 바라본다. 왠지 고개를 들면 혼날 것만 같은 마음에 차마 민영의 눈을 볼 수가 없다.


"다녀왔구나.. 아파트.."

한참을 아무 말도 없던 민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민영을 바라보니 민영의 시선은 카메라로 향해있다.

"응.."

오영도 말없이 카메라를 건넸다. 민영은 한참을 망설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방금까지 오영이 찍어댄 사진들이 수십 장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문득 바뀐 배경에 손을 멈춘다.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다시 눌러본다. 그리운 곳의 흔적들이 사진 곳곳에 찍혀 있다. 머릿속에 많은 장면들이 봇물 터지듯 마구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말릴 새도 없이 터져버린 민영의 눈물에 오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그저 휴지만 집어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지난밤의 일을 민영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마음으로 아파트를 갔고 어떤 기억이 났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지난밤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쏟아냈다. 그리고는 아침에 아파트에서 나올 때 가져온 카메라와 작은 장난감을 보여주며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나, 이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기억은 안 나지만 다시 배우고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너한테 얘기하러 왔어. 나 이젠 일을 해보려고. 너도 지키고 나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민영의 커피 속 얼음은 어느새 거의 다 녹아있다.

맛도 없어 보이는 커피를 말없이 홀짝 거리던 민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영 씨, 그 장난감.. 우리.. 우리 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다시 울음이 터진다. 울음을 겨우겨우 삼켜가며 말을 이어가는 민영이 안쓰럽다. "우리 지혜.. 우리.. 딸.. 우리 지혜.. 장난감.. 그거.. 우리.. 지혜.. "

'지혜..? 우리 딸 이름이 지혜라고..?' 처음 들은 딸의 이름에 오영의 손도 덩달아 떨려온다. 그렇게 민영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우리 딸'의 이야기를, 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가던 둘은 카페 마감시간이 되어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하며 일어났다. 민영도 어느새 조금 진정되어 있었다. 조금은 담담해진 목소리로 민영은 이야기했다.

"난 잊을 수 없지만, 오영씨는 기억을 못 하니까.. 우리 지혜, 이제는 나만 놔주면 되겠지. 오영씨는 옛날에도 그랬어. 사진 찍는 거 참 좋아하고 나도 우리 지혜도 많이 찍어 줬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며 민영은 아까 오영이 찍어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내가 이런 표정을 하고 사는구나..? 웃는 표정이 참.. 예쁘다.. 예쁘게 찍어줬네 여전히."

겨우 멈춘 울음이 다시 터질 것 같자 오영은 다급히 카메라를 집어 들고 장난스레 이야기한다.

"우는 모습도 예뻐. 세상에서 우는 게 젤 예쁜 사람으로 내가 더 예쁘게 찍어줄게!!"

그 말에 민영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어~ 안돼. 우는 걸 예쁘게 찍어야 하는데 웃는 건 이쁜 거 알잖아. 웃는 거 찍으면 내가 잘 찍는 거 보여줄 수가 없는데~" 어린아이처럼 다급하게 웃는 걸 저지하는 모습에 민영은 이내 웃음이 터져버렸다.


"오영 씨, 우리 내일 아파트에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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