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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Dec 21. 2022

겨울일기

춤보다 작은 형태로서의 글쓰기

이름이 낯익네. 떠올려 보니 고등학교 때 친구가 읽어보라며 줬던 ‘달의 궁전’, ‘빵 굽는 타자기’의 작가 폴 오스터. 그런데 난 그 책들을 읽지도 않고 십년이 지난 어느 날, 책장 정리를 한답시고 박스에 담아 버렸던 기억 한 조각이 있다.


20년이나 흘렀다.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책도 안 읽었는데 도서관 구석에 박힌 책을 발견해서 읽다니, 기분이 묘하다. 겨울이라, 일기라 마침 두 단어의 조합이라 아주 좋았다.

“당신은 잘 지냈군요?” 

64세가 되어 당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 형식의 글을 썼으니, 여전히 작가는 글을 쓰고 여전히 책은 출판이 되고, 잘 지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이 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내가 뒷걸음으로 한 발 물러서서 나를 ‘당신’이라 지칭하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64세의 나가 어느 나이의 ‘나’를 관찰하며 인생을 돌아본다.


오늘은 눈이 더 많이 내린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가니 뒷마당의 나뭇가지들이 하얗게 변해 가고 있다. 당신은 예순세살이다.
소년 시절부터 여태까지의 기나긴 여정 동안 당신이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때는 거의 한순간도 없었던 것 같다. 30년간의 결혼 생활도 그렇지만 그전의 30년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사랑의 열병과 한눈에 반하는 설렘을 겪고 얼마나 열정에 불타 상대를 쫓아다녔으며, 제정신을 잃고 미친 듯이 욕망에 휩쓸린 것은 또 몇 번인가?
기억하는 삶의 첫 순간부터 당신은 에로스의 열렬한 노예였다. … 생김새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면의 빛, 유일무이한 불꽃, 밖으로 표출되는 자아의 불길이었다. … 당신의 흉터들 중에서도 특히 얼굴에 난 것은 ….


얼굴의 작은 흉터부터 시작해 그의 삶을 스쳐간 흔적들을 모조리 불러낸다. 심지어 세 살 적 기억도 나온다.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해서 복원시켜 놓을 수 있을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에게는 가능했다. 그의 에로스는 그가 호흡하는 한 숨, 한 숨 마다 깃들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주소의 변천사다. 건축 양식까지 세세하다. 이건 아주 간략하게 몇가지 단어만으로 간추린 축약이다. 주소지마다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끝도 없이 콸콸콸. 시공간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고 꼼짝없이 잡혀있다.

1. 뉴저지, 이스트 오렌지, 사우스 해리슨 가 75번지. 태어나서 한 살 반까지- 텔레비전

2. 뉴저지, 유니언, 빌리지 로드, 1500번지. 한 살 반부터 다섯 살까지- 코코아를 쏟은 흉터

3. 뉴저지, 사우스 오렌지, 어빙 애비뉴 253번지. 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 어린 시절의 거의 모든 기억

4. 뉴저지, 사우스 오렌지, 하딩 드라이브 406번지.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사춘기의 고통을 시와 소설로

5. 뉴저지, 뉴어크, 밴 벨저 플레이스 25번지. 열일곱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부모의 이혼 후 엄마와 여동생과의 보금자리

6. 컬럼비아 대학교 기숙사, 카먼 혼 814A, 열여덟살에서 열아홉 살까지- 수백권의 책을 탐독하고 침대 위에서 엉킨 여자 친구들

7. 맨해튼, 웨스트 107번가 311번지. 열아홉 살부터 스무 살까지- 나쁜 꿈들

8. 맨해튼, 웨스트 115번가 601번지. 스무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 처음으로 혼자 얻은 아파트에서 시와 평론, 소설 집필. 데모와 연좌 농성, 동맹 휴학, 경찰의 현장 급습, 학원 소요, 퇴학의 격동기

9. 맨해튼, 웨스트 107번가 262번지, 스물 두 살부터 스물네 살 생일1+2주- 첫 동거

10. 파리, 15번구, 자크 마와스 3번가. 스물 네 살- 헤어진 여자친구를 다시 파리로 불러 동거

11. 파리 1번구, 루브르 2번가. 스물다섯살- 방세가 공짜인 샤워실도 없는 하녀방

12. 파리 5번구, 데카르트 29번가. 스물여설 살- 자유기고 일이 많아짐

13. 바르, 무아사크벨뷔, 생마르탱, 남동부 프로방스의 농가. 스물 여설 살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여자 친구와 시골 생활

14. 맨해튼, 웨스트 116번가와 웨스트 119번가 사이의 긴 블록 가운데에 있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456번지. 스물일곱 살부터 스물아홉 살까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여자 친구와 드디어 첫 결혼.

15. 캘리포니아, 버클리, 듀랜트 애비뉴 2230번지. 스물아홉 살- 답답하던 인생에 다른 가능성이 열림

16. 뉴욕, 스탠퍼드 빌, 밀리스 로드 252번지. 서른살부터 서른한살까지- 절망적인 세월. 아들 태어남

17. 맨해튼, 바릭 가 6번지. 서른 두 살. - 결혼 생활 파경 후 이사할 돈도 없어서 구한 처참한 집, 그러나 다시 글쓰기 시작

18. 브루클린, 캐럴 가 153번지. 서른세 살부터 서른네 살까지- 아내를 만남

19. 브루클린, 톰킨스 플레이스 18번지. 서른네살부터 서른 아홉 살까지- 결혼, 우주적인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고 처음 느낌

20. 브루클린 아파트 3B, 3번가 458번지. 마흔 살부터 마흔 다섯 살까지- 아내 임신, 행복한 시절

 … 수많은 집들을 알아보고 다님 …

21. 브루클린 파크 슬로프 어딘가. 마흔 여섯부터 지금까지- 아내가 있어 행복, 집에 정착     

 

미국 50개주 중 40개 주에서 다 지내봤다고 하니 작가의 이사와 더불은 그의 인생 곡선이 어떠했을지 짐작만 살짝 해 본다. 그리고 수천번의 여행들. 움직임으로 가득한 그의 세계. 주소지 변천사가 짐작하게 하는 출렁이는 감정의 바다. 세세한 기록들에 놀랄 뿐이다. 이 작가는 시간마다 선명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하루하루 깊이 발자국을 찍는다. 작가의 하루만 유독 깊은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작가는 글을 쓰며 깊이 발을 딛는다. 그리고 충분히 젖는다. 그게 행복이든 불행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보인다. 신경도 안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의 인생이 만들어졌다.


거의 무일푼으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운이 났다. 글을 쓸 수 있는 한 어디에서 어떻게 살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 고백은 가장 처참했던 방, 친구 호의로 건물 꼭대기의  하녀 방에서 살았던 시절, 작가가 쓴 독백이다. 창가의 풍경이라곤 지하에 들끓는 생쥐뿐이었다. 그것도 우아하고 근사한 파리라는 도시 안에서 말이다. 쥐를 보며 글을 쓰는 데도 쥐 < 글이기에 그의 세상은 글에 대한 에로스로 가득 차오른다.


작가를 검색해보니 천재라고 소개된다. 일기를 읽은 나는 그가 쓰고 쓰고 또 쓰고 하다 천재가 되었다는 과정까지 알게 된다. 지독한 몰입. 존재로서 살고자 쓰는 호흡과도 같은 행위, 글쓰기였다. 매순간마다 모든 감각과 지성을 사용해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열정이 태양같다. 그가 글을 쓰지만 글은 그를 이끌었다. 사랑으로 인생으로, 가장 깊은 생의 한 가운데로. 글은 그에게  롤러코스터다. 부드럽게, 유려하게, 빠르게, 신나게, 멈추지 않고 가게 했다. 부럽다.


그에게도  글쓰기에 좌절했다 일어선 순간이 있었다. 무용수의 몸짓을 보고 글쓰기의 기묘함을 깨우친다.


당신이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걸을 필요가 있다. 걷다보면 단어들이 떠오르고, 머릿속에서 그것들을 쓰면서 단어들의 리듬을 들을 수 있다.
 한 발 앞으로,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심장이 이중으로 두근두근 뛴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두 개의 팔, 두 개의 발. 이것 다음에 저것, 저것 다음에 또 이것. 글쓰기는 육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몸의 음악이다. 단어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글쓰기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어들의 음악은 의미가 시작하는 곳이다. 당신은 단어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걷고 있다. 언제나 걷고 있다.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당신의 심장의 리듬, 심장의 박동이다. 만델스탐은 이렇게 말한다. “단테가 신곡을 쓰면서 닳아 없앤 신발이 몇 켤레일지 궁금하다.”
 춤보다 작은 형태로서의 글쓰기.     


춤추는 글쓰기라니, 몸과 글쓰기의 상관 관계를 깨우치게 될 그날. 나에게도 곧, 오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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