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김장을 하지 않지만 김치 냉장고엔 묵은지가 가득하다. 의문의 김치들은 ‘언니들 김치’다. 언니들의 정체는 엄마의 아는 언니들이다. 엄마 주변엔 솜씨 좋은 언니들이 있다. 그 언니들에게서 김치를 받는다. 우리집에선 식탁에 맛있는 김치가 올라오면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어느 집 김치야?”
솜씨 좋은 언니의 성함이 나오면, ‘오 역시’ 하면서 맛있게 먹곤 한다.
나는 김장 안 하는 집 딸치곤, 김치 없인 밥을 못 먹는 입맛이다. 김치는 맛이 있건 없건 훌륭한 반찬이 된다. 맛있는 김치는 그 자체가 훌륭한 반찬이다. 굳이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맛이 흡족하지 않은 김치는 씻어서 요리해 먹으면 된다.
김치찌개를 자주 해 먹는 편이다. 주로 앞다리살을 사용한다. 가격이 착하기도 하지만, 가격을 떠나 앞다리살이 맛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삼겹살이나 목살 비계는 으스러지는데, 앞다리살은 비계가 적당히 탱글탱글해서 덜 느끼하다. 시중에 파는 김치찌개용 고기는 보통 500그램이 넘기 때문에 반씩 나누어 하나는 얼려둔다. 고기를 많이 먹고 싶으면 수육용 앞다리살을 두툼하게 토막 내어 1인 김치찜을 해 먹는다. 김치찜은 자칫 잘못하면 바닥이 타버리기에 밑에 양파를 넉넉히 까는 것이 좋다. 너무 익어버린 김치는 씻어서 활용한다. 씻은 묵은지나 무김치는 단무지 대신 김밥에 넣으면 깔끔하고 개운한 맛을 낸다. 단무지의 확 튀는 새콤함보다 은은한 새콤함이 매력적이다.
김치를 오랫동안 두고 먹다 보면 종종 윗면에 골마지가 끼곤 한다. 위생팩으로 덮어두거나종종 꺼내어 윗면에 김치 국물을 적셔주면 골마지가 끼지 않는다. 처음엔 곰팡이인 줄 알고 김치를 통째로 버리곤 했다. 어느 날은 김치가 아까워 찾아보았다. 무려 한국식품연구원 부설 세계김치연구소 연구팀에서 골마지는 김치 효모에 의해 생성되는 물질이며 독성이 없고, 씻어서 가열해 먹으면 안전하다고 한다. 연구 결과가 있으니 깨끗하게 씻어서 물에 10분 정도 담갔다가 코인 육수와 된장, 들기름을 넣어 자박하게 지졌다. 구수하고 개운한 맛이 자꾸만 밥을 불렀다.
김장은 못해봤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겉절이들을 시도해 보았다. 무생채, 봄동 겉절이, 배추 겉절이를 담가본 결과, 맛을 내기가 힘들었다. 수고스러운데 맛이 별로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고 보면 김치는 은근히 까다롭고, 내공이 필요한 음식이다. 재료도 신선해야 하고, 소금에 잘 절여야 하고, 간도 딱 맞게 맞춰야 한다. 게다가 크기가 작은 자취방 냉장고에선 겉절이가 빨리 익어버려맛있게 보관하기도 힘들었다. 열심히 만들었지만 겉절이들은 대부분 다 먹지 못하고 버려졌다.
한 달에 한번 본가에 가면 김치를 들고 온다. 엄마는 김치 냉장고 속 수많은 언니들 김치 중, 가장 내 입맛에 맞는 걸 싸주기 위해 하나씩 맛을 보여준다. 엄마도 종종 물김치, 파김치, 고구마순 김치 등을 담그곤 한다. ‘언니들 김치’를 많이 먹어서일까, 엄마의 김치도 그에 못지않게 맛있다. 레시피는 때에 따라 바뀌는 것 같다. 내게는 딱히 정해진 엄마 김치 맛은 없다. 그렇지만 맛있는 김치를 잘 보관해 뒀다가, 기차 타고 돌아가는 딸에게 행여나 곤란한 일이 생길까 김치 국물이 흐르지 않게 꽁꽁 싸매어 주는 엄마가 싸준 김치는 있다.
냉장고에 김치가 넉넉할 때 집밥을 차리면 마치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래 뭉근히 끓여 먹는 김치찜도, 귀찮을 때 휘리릭 볶아 먹는 김치볶음밥도 다 공들여 담근 김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김치는 집밥의 기본이자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