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늘 진실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을 뿐.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라는 환경 속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랑관을 형성한다. 책, 노래 가사, 드라마 혹은 부모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이 사랑의 당연한 얼굴이라며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좀 더 진실된 사랑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꿈꾸는 진정한 사랑은 ‘자유’와 연결된다.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달콤함과 감성에 빠져 구속이 사랑의 모습이라고 믿지만 그건 그저 사랑의 탈을 쓴 허상일 뿐이다.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기에 존재하지 않는 일에 의심하기도 한다. 집착하는 순간 나의 자아는 빛을 잃음과 동시에 어둠에 갇히고 만다. ‘온전한 나’로 존재할 자유를 잃게 된다.
바라는 것 없이 기쁘게 내어주면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 혹은 동물, 사물을 포함한 많은 관계 속에서 아끼는 마음으로 친절과 사랑을 베푼다. 딱 그 지점까지 여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주는 만큼 받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 요구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온전히 나눌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되어 날개를 단 듯 자유로워질 수 있다.
통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은 상대가 아닌 내가 자유롭기 위함이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연인이든 부모와 자식 간이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통제하려 한다. 내 세계관에 맞지 않다는, 이 모든 게 너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바꾸려고 한다. 상대는 내가 통제하고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결국 내 기대에 못 미치는 일들의 반복은 스스로에게 상실감을 안겨준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존중과 배려로 가득한 수용이라는 이름의 사랑은 결국 기대와 상실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안겨준다. 더불어 사랑이 충만한 관계를 진실되게 유지할 수 있다.
내 사랑에도 애틋함, 희생, 소유, 집착, 탐욕 등이 버무려져 있었다. 사랑이 주는 환상으로 인한 박탈감과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상대방을 원망하는 독이 든 마음을 가지기도 했었다. 이런 사랑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늘 아슬아슬하다. 어느 한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사랑을 하는데 싸우고 외롭고 괴롭고 슬프다. 상대방의 행동과 표정, 말, 표현에 마치 내 손과 발이 묶여있는 것 같다.
사랑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며 생긴 고찰로 지금의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 신기할 만큼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평화가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랑의 충만함은 이렇게 타인에서가 아닌 내 안에서 자연스레 발현되어야 한다.그렇게 사랑의 주체자가 되면 나는 자유롭고 진정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오로지 가슴으로 알아볼 수 있다. 본질적인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생텍쥐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