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노트는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쓴 일기장이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은 오늘도 일찌감치 침실에 이부자리를 펴고 잘 준비를 한다. 나는 살그머니 거실로 나간다. 암막 커튼을 완전히 닫아 바깥에서 집안으로 스며드는 인공의 불빛을 차단한다. 항상 같은 자리에 놓여있는 진회색 BIC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인다. 무명을 밝히는데 작은 가스라이터 하나면 충분하다니, 어쩐지 안심이 된다.
아름다운 것들의 목록을 써 보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촛불을 포함시킬 것이다. 오벨리스크처럼 뾰족 솟은 불꽃의 형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정물화가 되고, 바람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우아한 무용수가 된다. 그 모습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헤아려 볼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무지한 관람객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겸허히 받아들인다.
촛불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순간에는 반만 나 자신이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랬던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엎드린 채 혼자의 기분을 만끽한다. 15분의 기도는 24시간을 살아갈 심지(心志)를 준다.
방으로 다시 들어오니 남편은 어느새 잠에 들었다. 드르렁, 작게 코를 곤다. 코끝을 살짝 건드려주면 코골이를 멈춘다. 자는 순간에도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 방에 불을 끄고 책상 앞에 앉아 똑딱, 탁상용 스탠드를 켠다. 새로 구입한 로이텀 독서노트를 펼친다. 어느새 여덟 페이지나 썼다. 필사란 다른 작가의 문장을 베껴 쓰는 단순한 작업이지만 어떤 날은 과거 왕조의 사관이라도 된 양 ‘나’에 관한 내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 달 전에 베껴 쓴 문장을 보며 그 당시에 내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알고 싶어 했는지 유추해보기도 한다. 필사 노트는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쓴 일기장이다.
나는 무엇이든 좋아할 수 있고
잘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독서노트를 쓰면서 알게 됐다
오늘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을 읽었다. 필사할 문장은 미리 밑줄을 그어 표시해 두었으니 옮겨 적기만 하면 된다. 일단 백지 위에 오늘의 날짜와 책 제목을 적는다. 책 제목을 쓸 때는 0.8mm 굵기의 ‘유니핀 피그먼트’ 펜을 이용한다. 드로잉 펜이지만 글씨를 쓰기에도 손색이 없다. (사실, 문자의 기원은 그림이지 않았는가) 사각사각 부드러운 필기감이 좋지만 문장 전체를 필사하기에는 조금 굵고 진하다. 0.7mm 굵기의 남색 ‘파일롯 프릭션볼’로 책의 부제도 써넣는다. 약간 물을 희석한 듯한 색감이 마음에 든다.
나머지 필기는 유니볼 시그노 RT1을 사용한다. 새로 산 노트와도 궁합이 좋다. 독서노트를 쓸 때는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한다. 그림 실력은 별로지만 눈썰미는 좋은 편이다. 길이나 무게를 자나 저울로 재지 않고도 근삿값으로 맞추고 한번 가본 길, 한번 만나본 사람의 얼굴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있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은 곧잘 한다. 때로는 문장을 필사하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게 더 재밌을 때도 있다. <위로하는 정신>의 표지에는 달관한 듯한 몽테뉴의 크로키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스테들러 루모그래프 8B 연필로 베껴 그린다. 필사를 꾸준히 하면서 글씨체가 발전했는데 그림도 자주 그리다 보면 늘 것 같다.
독서 노트에 그림을 그려보기 전까지 나는 스스로 미술을 싫어하고 못하는 사람이라 낙인찍었다. 학교 다닐 때도 미술 시간을 가장 싫어해서 일주일에 딱 두 시간만 수업을 들어도 된다는 게 행복할 정도였다. 제대로 그려보지도 않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그림 그리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림을 막연한 상상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일상 속 관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미술을 좋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재주란 타고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계발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섣불리 자신의 한계를 긋는 데 익숙하다. 나는 그림을 못 그려, 나는 악필이야, 나는 책만 읽으면 잠이 와, 나는 끈기가 없어, 포기가 빨라, 덜렁대고 깔끔하지 못해, 게을러. 낯선 타인이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반발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게는 냉담한 평가를 서슴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든 좋아할 수 있고, 잘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독서노트를 쓰면서 알게 됐다.
실제로 독서노트를 쓰면서 필체뿐 아니라 필기력도 늘었다. 나는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지를줄만 알지, 치울 줄은 몰라' 엄마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이었다. 어수선한 나의 면모는 노트 필기에도 반영되곤 했다. 대학 강의 시간에 필기한 내용을 집에 와서 들여다보면 낙서인지 노트 필기인지 도대체 분간이 가질 않았다. 강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이해하기보다 일단 교수님의 말을 최대한 다 받아 적는 데만 급급한 거였다.
지금의 내가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필기 왕이 될 자신이 있다. 이제는 책을 읽고 요약정리를 하는 데도 요령이 생긴 것이다. 한 권의 인문서를 읽고 나면 해당 책의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분류해 요약할 것인지 금방 판단이 선다. 철학적 개념을 표로 나누어 정리하기도 하고, 책에 소개된 학자나 전문가의 주장이나 의견을 기준으로 내용을 요약하기도 하며,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키워드를 쓰고 뒷받침되는 사례를 한두 개 옆에 적어 넣으면서 통일감 있게 필기한다. 소설의 경우에는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이동되는 시공간적 배경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요약하고 인물관계도를 그려 복잡한 내용을 한 페이지에 요약하기도 한다. 나는 필기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필사를 깔끔하게 하는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중 하나는 기호를 활용하는 것이다. 요즘에 나는 문장 앞에 책갈피 기호를 그려 넣는다. 필사할 문장 앞에 귀여운 도형을 그려주면 다른 문장과의 구분도 뚜렷해지고 훨씬 더 정돈된 형태의 필기를 완성할 수 있다. 무척 사소한 팁이지만 사실 정리란 미세한 터치 하나하나가 중요한 법이다. 화장대 위의 화장품을 브랜드명이 보이도록 두는 것과 보이지 않게 두는 것이 집안 분위기를 좌우할 수도 있다.
두 번째로는 –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붓글씨를 쓴다는 마음으로 글자를 천천히 쓸수록 좋다. 물론 서예를 할 때처럼 획 하나하나 긋는데 심혈을 기울일 필요는 없지만 평소 글씨를 쓰는 속도보다 의식적으로 느리게 쓰면 단정한 서체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시간을 들여 문장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다 보면 필사가 ‘베껴쓰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위로하는 정신>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옮겨 적었다.
“몽테뉴는 책에 메모하고 줄을 긋고 마지막에는 책을 다 읽은 날짜와 그 책이 자기에게 준 인상을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비판도 아니었고 문필 작업도 아니었으며 그냥 연필을 손에 잡고 하는 대화였다.”
<위로하는 정신_슈테판 츠바이크. 60/119>
슈테판 츠바이크는 몽테뉴의 ‘독서 기록’을 ‘연필을 손에 잡고 하는 대화’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와의 대화인가. 바로 나 자신과의 대화다. 30대 후반, 요즘 말로 ‘조기 은퇴’한 몽테뉴는 자신만의 성에 가서 책탑을 쌓아놓고 읽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책에 메모하고 밑줄을 긋고 느낀 점을 적어 넣었는데 여기에는 세속적인 목적이 없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도 똑똑해지기 위해서도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자기 보존의 예술’이라고 묘사했는데 나는 이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노트에 적어두었다.
몽테뉴가 살던 시대는 종교 전쟁으로 온 세상이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16세기 말이었다. 르네상스라는 희망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한순간 재가 되었고 숭고한 휴머니즘은 야만성으로 추락했다. 서로가 서로를 약탈하고 죽이고 무덤까지 파헤치는 세상에서 몽테뉴는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려 했고, 이는 4백 년 후 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역사를 통과하며 인류애에 회의를 느꼈던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온 세계가 태평성대였던 시기가 있었나 싶다. 2020년인 지금, 우리 눈 앞에는 당장 기후위기라는 시급한 문제가 놓여있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잔인한 살육이 계속되고 있고 핵 미사일 한 방이면 지구의 운명은 게임 오버다. 하지만 이것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먹고 살만한 데도 '먹고사니즘'에 급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는 남을 밟고 올라서기 위한 무기 하나쯤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의 이익과 안녕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선량한 일반 시민도 그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 용인되며, 방패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당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별력은 점점 흐릿해져서 '성공'의 의미를 헤아려볼 겨를도 없이 성공이라는 관념만 쫓고 있다. 물질적인 삶의 질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정점을 찍었는데 그만큼 개인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도 강해진다. 10억을 가지고 있어도 친구가 100억이 있으면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이 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을 ‘보존’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몽테뉴가 자기만의 요새에 들어가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남겨준 어마어마한 유산이 있었던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더 모르겠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촛불 앞에 앉아 단 10분이라도 명상을 할 때, 잠들기 전 노트를 펴 놓고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단 한 문장이라도 필사할 때 진실한 나 자신과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들이 쌓인다고 해도 완벽히 자유로워질 수 없고 세상을 다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어쨌든 그 때큼은 숨통을 트일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내 손으로 꾹꾹 눌러쓴 문장을 보며 한 줌의 위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단 한 문장의 필사로 평생을 살아갈 심지를 얻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몽테뉴가 '내가 무엇을 아는가' 라는 격언을 적어 서재 천장 들보에 붙어두고 수시로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