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국민 간식 드롭Drop에 대해.
로알드 달의 자전 소설 ‘보이’는 어릴적 내가 제일 좋아했던 책 중 하나다. 그가 묘사한 어린 시절 추억의 사탕 가게 이야기를 읽을때마다 나는 황홀해졌다. 온갖 색깔과 모양의 달콤한 과자들, 사탕들이 가득 담긴 유리병. 금박이 둘러진 쿠키 박스, 마호가니 진열장과 그 안의 온갖 간식들. 어릴때 미국 출장을 다녀온 아빠가 나에게 주셨던 디즈니랜드의 양철 캔디 박스를 받았을때 느꼈던 기쁨을 로알드 달의 사탕 가게 묘사를 읽으며 다시 한번 느끼곤 했다. 나는 영국의 어린이가 아니었지만, 그의 소설은 노스텔지어도 간접 경험케 하는 힘이 있다.
‘보이’를 읽으며 종종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감초 사탕’의 맛이었다. 영미권 어린이 책을 읽으면 이 감초 사탕이라는게 굉장히 자주 나온다. 나는 막연하게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맥주 사탕이나 크리스마스의 캔디 케인 같은 맛을 떠올렸다. 어쩌면 솜사탕과 라즈베리 잼을 섞은 환상적인 맛일지도 모른다. 감초 캔디를 구할 수 없는 한국에 살았던 나는 그것은 유니콘 같은 환상의 존재로만 생각했다.
나는 감초 사탕을 네덜란드에 와서 맛보았다.
환상의 존재가 네덜란드에는 도처에 널려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드롭 Drop’ 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검정색 사탕들. 이 드롭들은 슈퍼 어디를 가든 사탕 진열대에 가득하고, 캔디 스토어의 1/3 정도 진열장을 차지한다. ‘드롭’이란 명칭을 들었을때, 어릴때 할머니가 종종 사다주셨던 일제 깡통 사탕의 ‘사쿠마 드롭스’가 생각나서 참 반가웠다. 일본과 네덜란드가 먼 옛날 무역을 했던 영향이 사탕 명칭에도 반영된 것일까.
네덜란드의 드롭들은 고양이, 자동차, 동전, 닭, 집, 물고기, 클로버, 소용돌이, 세모, 동그라미, 네모 모양 등등 수 많은 디자인이 있지만, 색깔만은 예외 없이 짙은 검정색이다.
나는 클래식한 동전 모양의 드롭을 사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입 씹어보았다.
그리고 바로 뱉었다.
그 검정색 드롭은 내 아기자기한 상상으로 가득한 추억을 박살냈다.
악마가 유황불 맛 사탕을 만든다면 이런 맛 아닐까? 타이어 고무에 당근 즙과 춘장과 소금을 섞어서 굳힌 맛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먹었던 마마이트와 굉장히 비슷했다. (그러고보니 똑같은 검정색이다.) 대체 누가 이걸 사탕의 카테고리에 집어넣은걸까. 이건 고문 도구다. 잔뜩 구겨진 내 표정을 보고 옆에서 네덜란드 친구 N이 웃으면서 말했다.
‘외국인들은 다 똑같이 반응하더라.’
그리고 그녀는 태연히 드롭을 입에 넣고 미소지었다. 나는 그녀를 변태 입맛이라고 놀렸고, 한참동안 우리는 드롭의 맛에 대해 열띤 찬반 토론을 거쳤다. 물론 아무도 이기거나 지지 않은, 쓸데없는 토론이었다.
드롭, 혹은 리코리스 liquorice 사탕은 흥미롭게도 북반구 국가들, 즉 스칸디나비아 부근에서만 인기가 있다.
네덜란드/벨기에를 경계선으로 그 아래쪽 나라들은 드롭을 전혀 먹지 않는다고 한다. 네덜란드와 핀란드가 드롭 소비 1위 국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듯 하다. 바이킹 족의 DNA는 감초 맛을 좋아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일까? 마치 한국인에게 고수 맛을 비누 맛으로 느끼는 DNA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감초가 약재이다보니 몸에 좋다는 인식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짠 맛 때문에 고혈압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단 맛이라는 것이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네덜란드에 살면서 맛을 느끼는 기준은 과연 상대적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기차역 슈퍼를 예로 들어본다. 기차 통근자 비율이 많은 네덜란드 답게 1회용으로 포장된 먹거리들이 슈퍼에 많은데,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미니 당근이다. 사과와 포도 사이에 생 당근이 ‘간식’으로 포장되어 있다. 학교에서도 많은 네덜란드 친구들이 미니 당근을 간식으로 즐겨 먹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던 적이 많다. 진심으로 ‘달콤해서’ 좋아하는 것이다. 호기심에 나도 먹어보았지만 그냥 약간 더 단 맛의 당근일 뿐이었다. 어렸을때부터 미니 당근을 간식으로 많이 먹는다는 것을 듣고 ‘애들이 야채를 좋아한다고?’라고 의문만 더해졌다.
남편 M 역시 어쩔수없는 네덜란드인 이기에 드롭도 생 당근도 좋아한다. 나는 M을 사랑하지만 그의 유러피언 입맛에는 동의할 수 없다. 네덜란드에서 만난 그 어떤 한국인도 드롭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형부는 어릴때 독일에서 드롭맛 하리보를 사온 고모 덕분에 검정색 젤리만 보면 치가 떨린다고 한다.
반면에 M 역시 내가 좋아하는 단 맛을 싫어할 때가 있다.
우리가 한국에 여행을 갔을 때 M은 직장 동료들 선물로 가장 한국적인(authentic) 사탕을 사고싶다고 했다.
내가 의기양양하게 골라준 것은 누룽지맛 사탕이었다. 물론 누룽지 사탕은 호불호가 갈리는 할머니 사탕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이라면 공감 가능한 단 맛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누룽지 사탕은 너무 실험적인 맛 이었나보다. 두 달이 넘도록 M의 직장에 산더미같이 누룽지 사탕이 쌓인채로 전혀 줄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M 역시 집에 있는 누룽지 사탕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M 역시 드롭을 처음 먹어본 나 같은 반응을 했다. M의 열띤 반응을 글로 옮겨본다.
"나는 태운 쌀밥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없어. 전혀. 게다가 쌀밥을 태운다는건 요리에 실패한거잖아. 그걸 굳이 왜 먹어? 태운 쌀 맛 사탕을 만든다는건 우리로 따지면 태운 감자맛 사탕을 만드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 아무도 그런걸 먹고싶어하지 않을껄? 대체 왜 이런걸 사탕으로 만든거야?"
저 말을 들으며 '구운 감자 맛 사탕? 맛있겠는데?' 라고 생각한 것을 M은 모른다. 그렇다, 나는 탄수화물에 한없이 너그러운 한국인인 것이다.
아마 네덜란드에 오지 않았다면 어릴적 상상했던 로알드 달이 묘사한 감초 사탕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맛으로 내 맘 속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환상이 깨진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맛의 경험치를 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어떤 글이나 사진으로도 ‘맛’은 배울 수 없다. 맛을 느끼는 것은 색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 처럼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감각이다. 인간은 시시각각 '반응하는' 동물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모여 나를 나 답게 만드는 경험으로 축적된다. 나는 내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즐겁다.
내가 앞으로도 드롭을 좋아할 일은 전혀 없다. 장담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저 '나 라는 인물의 사전'에 '감초 맛을 싫어함' 이라고 적혀있을 뿐이다.M이 동의하든 말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감초 사탕을 먹는다고.
*드롭에 대한 네덜란드 비디오를 소개한다. 자막 옵션을 클릭하면 영어 자막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