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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Jul 31. 2020

대 코로나 시대 4개월, 오늘도 저는 네덜란드에 삽니다

외국인의 눈으로 본 네덜란드의 코로나 타임라인


오늘은 2020년 7월 30일.

코로나 아웃브레이크가 본격적으로 네덜란드에 상륙한 지 4개월이 조금 넘어간다.


작년에 나와 일을 같이한 그래픽 디자이너 N과 오전에 미팅을 했다.

N은 남자 친구를 만나러 아이슬란드에 3월 중반에 갔다가, 하필이면 그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염된 바람에 졸지에 함께 검사받고 아이슬란드에 말 그대로 ‘갇혀있었던’ 스펙터클한 지난 4개월 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구가 그렇게 적은데도 운 없게 코로나에 걸린 남자 친구와 달리, N은 기적적으로 코로나에 전염되지 않았다. (혹은 검사 결과에 오류가 있었거나. 어쨌든 그녀는 멀쩡했다고 한다.)


그녀가 4개월간 네덜란드에 없던 사이, 이곳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일상을 지배한 대 코로나 수칙이 그녀를 만난 로테르담 중심가의 카페에도 어김없이 반영되어 있었다. 출구와 입구가 완전히 분리되어 동선을 분산시키고, 사람들이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 바닥에 테이프로 출입 동선이 안내되어있고, 손 소독제가 곳곳에 비치되어 있고, 직원들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커피를 날랐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코로나 사태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7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느슨해진 코로나 정부지침 때문인지,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대중교통을 제외한 나머지 장소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1000명 중 한 명이다. 네덜란드 정부가 ‘마스크의 효능에 매우 회의적’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마스크를 끼지 않는 대신 사람 간 1,5m 간격을 지키라는 권고사항 마저도,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로테르담은 현재 네덜란드 안에서 코로나 환자가 가장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전국의 코로나 환자 수가 2주간 다시 1500명 가까이 늘어났는데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 네덜란드 사회 안에서, 나 역시 눈치게임을 하며, 마스크를 벗고 산다.


이번 글에선 지난 4개월간, 내가 겪은 네덜란드 코로나 시국을 정리해보려 한다.




what should you do, photo by Min van der Plus, 2020





2월 말


네덜란드 남부 지방에선 전통적인 카니발 축제가 한창이었다. 수천수만 명이 거리에서 연례행사인 가장 퍼레이드를 즐겼다. 그리고 일주일 후 독일에서 넘어온 환자가 남부지역 카니발에 참석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 2월 말 카니발 후부터 남부지방의 ‘독감 환자’가 갑자기 늘어나고 있었지만 네덜란드 보건국 (RIVM)은 “네덜란드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상륙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낙관적인 트위터를 업로드하고 있었다.




3월


3월 초, 중국과 한국이 이미 2월에 코로나 아웃브레이크로 난리가 난 와중에, 드디어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헌 (Groningen)의 대학생 클럽 빈디캣 (Vindcat) 에선 무려 900명이 단체로 ‘오렌지 경보’가 퍼진 이탈리아 북부 스키장에 스키여행을 갔다가 네덜란드 보건국의 강력한 경고를 받고 대절버스로 귀국했다. 그러나 흐로닝헌시 보건국 국장은 일부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빈디캣 학생들은 보건국 권고 지침을 잘 지키는 성숙한 마인드를 가졌다’고 발표해 논란이 일었다.


남부 림버그 주 (Limburg)의 최대 도시 마스트리흐트 (Maastricht) 에선 유럽 미술 페어 중 규모가 큰 편인 TEFAF 준비가 한창이었다. 주최 측은 “우리의 주 고객층은 개인 제트기를 타고 마스트리흐트 공항에 도착하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될 리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개최 이틀 뒤 확진자가 나와 행사는 조기 폐쇄되었다.


길거리에선 아시안 인종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코로나 샤우팅을 당했다. “차이나 바이러스니까 당연히 내가 알 바 아니지”라는 마인드가 사회에 만연하다고 느꼈다.  역시 멀쩡히 길을 가다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코로나!”라고 놀리는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   겪었다. 집 밖에 나가는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져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잠시 인턴십을 했던 디자인 스튜디오 사람들은 ‘설마 네덜란드에 그런 전염병이 퍼질 리가’ 혹은 ‘걸려봤자 감기 정도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월 중반, 네덜란드 정부는 며칠 간격을 두고 중대한 입장 변화를 표명한다. 3월 12일에 마크 루터 네덜란드 총리는 ‘100명 이상의 모임을 금하지만 학교는 계속 연다’고 발표하지만, 이후 며칠간 확진자수가 급격이 늘어나자 사흘 뒤인 3월 15일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인텔리전트 락다운을 시행한다’고 밝힌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같은 극단적인 락다운은 아니지만, 카페나 스포츠클럽, 레스토랑, 학교 등은 다음날부터 영업을 중지해야 했다. 식료품점이나 식료품 배달은 허용되었다. 그 발표가 일어난 날부터 며칠간 네덜란드 내 슈퍼마켓들은 사재기 때문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인턴십을 포함한 모든 프리랜서 일도 중단되었다. 아포칼립스 영화의 도입부 같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3월 말, 네덜란드 내 코로나 확진자는 1만 명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와중 나는 시청에서 파트너십 세리머니를 올렸다. 나와 M, 두 명의 증인, 그리고 시청의 판사, 총 다섯 명이 참석한 세상 최고로 미니멀한 결혼식이었다. 우리 모두 1,5m 간격을 지키며 시국을 100% 반영한 기념사진을 찍었다.






4월


집 밖에 나가기가 무서운 세상이었다. 매일 확진자가 천 명 넘게 나오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호흡을 멈춘 느낌이었다.


M의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코로나로 세상을 떠나셨다. 50대 중반의 정말 건강한 분이셨지만 중환자실에서 하루 만에 상태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M의 친정이 있는 네덜란드 남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라 우리 둘 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산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만약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2주간 격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3월 말부터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구하기 어려웠다.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외국 출신 친구들이 하나둘씩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KABK에서 졸업을 준비하던 친구들은 졸지에 건물 출입이 금지되어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졸업 전시는 9월로 연기되었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들과 프리랜서들에게 구제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매월 1인당 약 1000유로 정도의 구제금이 몇 개월간 지급되는 파격적인 조치였고, 신청 또한 비교적 간단했다. 물론 자격요건이 갖춰져야 했고, 아쉽게도 나는 해당사항이 아니라 신청하지 못했다.


M의 직장 동료들 중 어린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재택근무를 하며 아이를 돌보는데 큰 스트레스를 느꼈다. 학교도 문을 닫고 베이비시터도 부를 수 없는 코로나 수칙 때문이었다. 같은 가정 내 사람이 아니라면 모이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모두 이 룰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공공연히 모일 사람들은 여전히 모였고,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 벌금을 매기는 것이 뉴스에 나왔다.


4월 1일 13000명 경이었던 확진자 수는 20일 만에 33000명이 되었다.

총사망자는 4월 20일 경 3700명 정도였다.


네덜란드 정부는 4월 21일, ‘인텔리전트 락다운의 효과가 보이기 시작한다’며, 5월 11일경부터 코로나 지침을 보다 완화하기로 결정한다. 5월 11일부터 유아/초등학교 수업을 일부 재개하기로 한다. 슈퍼마켓의 사재기도 진정되었고, 한국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서양인들의 휴지 사재기’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매년 4월 말 네덜란드 왕국을 축복하고 기념하는 킹스 데이, 코닝스다흐 (Koningsdag)가 열려 모든 사람이 오렌지색으로 치장하고 폭죽을 날리지만, 올해 네덜란드의 코닝스다흐는 조용했다. 모든 모임이 금지된 가운데, 정부는 코닝스다흐 대신 워닝스다흐 (Woningsdag), 의역하자면 ‘집구석 데이를 선포했다.


4월 말부터 코로나 확진자, 중환자실 입원자수, 코로나 사망자가 ‘유의미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5월


대중교통 직원들이 ‘대중교통   마스크를 의무화하라 정부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와 보건국은 여전히 마스크 착용에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하면 의료진에게 돌아갈 물량이 부족하고, 마스크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언론과 정계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 매일같이 펼쳐졌다.


마침내 정부도 5월 11일 대 코로나 지침 완화 정책을 발표하며, 6 초부터 대중교통 마스크 착용의무화하기로 발표했다. 대중교통 노조의 압박 때문이었다. 더불어 6월 1일부터 레스토랑, 영화관, 바 등의 영업을 재개하는 대신, 모든 영업장은 사람들이 안전수칙을 지킬 수 있도록 테이블 간격을 넓히고, 동선을 안내하고, 손소독제를 비치하고, 실내에 최대 30명 이상이 모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정했다.


매일 발표되는 확진자 수가 1000 대에서 100명대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의 자가격리 수준으로 나를 가두었던 4월과는 달리, 5월부터 조금씩 산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헤이그에 있는 작업실로는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중교통 안에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는 6월 전까진 안전하게 집에 있기로 하는 동시에, 예정보다 빠르게 중고차 구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만의 교통수단이 절실해졌다.


네덜란드 내 한국인 커뮤니티에 마스크 착용을 했을 때 인종 차별을 당하는 사례들이 종종 올라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마스크를 끼고 거리를 걷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네덜란드 친구들이 늘어났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당당하게 끼는 것도 권력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내가 내면적으로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인종적인 스캐닝 앞에서 나는 아시안으로 비칠 뿐이라는 폭력적인 우울감이 느껴졌다.


5월 말 네덜란드 내 확진자는 4만 6천 명을 넘어갔고, 사망자는 6천 명에 육박했다.


동시에 확진자 그래프가 더욱 완화되기 시작했다.







6월



매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밀란 디자인 위크가 취소되면서, 대신 그 행사에 참가하던 에이전시들이 온라인으로 밀란 디자인 위크를 대체하게 되었다. 내 졸업 작품이 그 에이전시 중 한 곳을 통해 온라인으로 전시되었다. 언택트 시대의 긍정적인 효과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디자인 업계도 미술계도, 최대의 화두는 격리, 언택트, 온라인 전시였다. 판데믹 사태가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올 거라는 현실적인 불안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거나, 혹은 이 사태에 아랑곳없이 현상을 유지하려는 양상이 보였다. 네덜란드 안의 모든 뮤지움은 5월을 기점으로 서서히 문을 열었지만, 온라인으로 입장 시간을 예약해야만 했다.


큰 도시 안의 공원들의 풀밭에 지름 3m의 원들이 그려졌다.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그룹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정부 정책이었다. 사람들은 그 안에 앉아서 피크닉을 즐겨야 했다.


대중교통 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자마자, 온갖 웹사이트에서 핸드메이드 마스크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로테르담 지하철 개찰구 옆에는 마스크와 손세정제 자판기가 들어섰다. 대중교통 안 10명 중 8명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거리에선 100명 중 1명 정도가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Circles in the park, Photo by Min van der Plus, 2020.



네덜란드 안에서도 어떤 도시의 어떤 동네에 사느냐가 대 코로나 시대의 삶의 질을 가른다. 숲이 어디나 무성하고 안전한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 간 간격을 지키기 쉽고, 정원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공원으로 갈 필요 없이 안전하게 녹음을 즐길 수 있다. 반면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 간 간격을 유지하기가 상대적으로 힘들다. 특히 대도시의 가난한 이민자 동네일수록 코로나 지침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이런 말을 가감 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내가 사는 동네가 로테르담에서 손꼽히는우범지대라, 지난 몇 개월간 이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지침을 지킬 수 있는 심적 육체적 여유가 없는 이민자들을 자주 목격하다 보면 네덜란드 정부의 안일한 ‘권고식 대처’에 분노가 치민다. 그들이 조금만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만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경각심을 가질 텐데, 오랜 세월 동안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네덜란드 정부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확진자수가 1000명에서 100명, 100명에서 50명대로 줄어들기 시작했고, 7월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 확진자를 발표하던 네덜란드 보건국은 7월부터 1주일에 한번 확진자 수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확진자 수가 그만큼 줄어들어 예전만큼 위협적이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한 2차 웨이브를 대비한 병상 확보가 되어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현재.

7월 말이 되었다. 2주 사이에 확진자가 다시 1000명대를 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민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진자가 번지고 있고, 특히 로테르담이나 헤이그, 암스테르담 남부같이 가난한 이민자 사회가 큰 커뮤니티에서 2차 확산의 기미가 보인다.






네덜란드의 코로나 타임라인에 대한 현재까지의 내 감상(?)은 이러하다.


첫째, 네덜란드 정부는 예상보다 훨씬 더 완고하고 보수적이다.

EU 가입국 중 국가 재정이 매우 안전한 나라 중 하나이지만, 그 재정을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열린  하지만 완고한' 고집 때문이다. 이 나라는 어쨌든 타국과의 비즈니스 없이는 경제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사 코로나 2차 웨이브가 오더라도 3월 말과 같은 락다운은 결코 진행하지 않을 것이고, 국경 문을 걸어 잠그는 이탈리아 같은 조치는 더더욱 시행하지 않을 것이다. 2020년 2분기 성적을 발표하는 독일 기업들이 줄줄이 경제에 충격을 주고 있는 마당에, 경제적인 리스크를 결코 부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스크를 옹호하지 않는 이유도, '네덜란드는 안전하다'는 이미지를 타국에 심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본다. (혹은 그냥 ‘내가 맞아’라고 통고집을 부리는 것일 수도. 3월 초 기자회견에서 보건부 장관이 ‘그냥 손이나 잘 씻으면 피해 가는 병’이라고 쿨한 척 기자회견 하는 걸 보며 얼마나 울화통이 터졌는지!) 벨기에마저 모든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한 마당에, 이 이미지/눈치 게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 뉴스  속보가 보도되었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공공장소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될 예정이라고 한다.


둘째, 한번 정부 수칙이 정해지면 매우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각 기관/단체/개인이 대응한다.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정부 말을 잘 듣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마스크를 끼지 말라면 끼지 않고, 끼라고 하면 잘 낀다. 대중교통 이외의 장소에서도 마스크를 쓰라고 정부에서 발표하면 아마 다들 군말 없이 마스크를 낄 것이다.


각종 상점과 업장들에 매우 구체적인 지침이 내려왔는지, 플라스틱 창문이나 손 세정제, 소독제, 직원과 고객 간 간격을 안내하는 바닥 표시 같은 것들이 굉장히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네덜란드 전역의 공공장소에 배치되었다. 3월 말까지 미적거리던 정부를 생각하면 꽤나 의외인 반응속도다. 덕분에 6월과 7월에 코로나 확진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브런치에 제일 처음 쓴 글 (https://brunch.co.kr/@minvanderplus/1) 에서 네덜란드식 이성적 사고 (Nederlandse nuchterheid)를 (매우 시니컬하게) 다뤘을 때, 네덜란드 정부에 대한 내 실망감은 피크에 치솟아 있었지만, 결국 그 이성적 사고 덕에 코로나 사태가 유의미하게 진정된 것이다. 물론 확진자가 다시 오르고 있기에 결론을 내리긴 이르다.



셋째, 코로나로 인해 불거진 아시안 인종차별 이슈에 대한 정부 당국의 대응은 매우 소극적이다.

나는 아직도 야외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한국 길거리를 보여주는 유튜브를 보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것에 새삼 충격을 받았다. 길에서 마스크를 '내가' 끼는 것은 눈치가 보인다. 낯선 사람들에게 ‘코로나’라고 손가락질당한 경험히 생각보다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아시안 인종의 외양을 하고 눈에 튀는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유럽에 사는 동양인을 상대로 한 폭행과 폭언이 한국 언론에 여러 번 보도되었다. 네덜란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동양계 네덜란드인의 집 창문에 '코로나'라고 스프레이 낙서를 한다던가, 네덜란드 라디오에서 '중국집에 가면 코로나에 걸린다'며 조롱조의 노래를 부른다던가, 기숙사 엘리베이터에서 중국계 학생이 코로나라고 불리며 폭행을 당한다던가, 가장 최근에는 한국계 네덜란드 학생이 20명이 넘는 청소년 갱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롱당하고 얼굴을 걷어차이는 등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인종차별 퍼레이드가 몇 달간 펼쳐졌다. 하지만 언론 보도도 이 이슈에 다소 소극적이고, 정부나 왕실도 어떤 식의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 비할바 아니지만 네덜란드는 확연히 다인종 국가다. 한때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식민지 확장에 앞장섰던 나라답게 인도네시아나 수리남,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 이미 네덜란드 사회에 편입되어있고, 중국, 모로코나 터키, 폴란드 이민자 사회 역시 매우 덩치가 크다. 교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답게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들도 많다. 그로 인해 유럽 전역을 통틀어 가장 영어를 잘하는 나라이기도하다. 하지만 다인종 사회 규모나 인프라가 아닌 마인드셋을 따져보자면, '아직도 멀었구먼' 이란 소리가 솔직히 나온다. 내 기대치가 너무 큰 걸까.




어쨌든 2차 대전 이후로 유럽의 앞날이 가장 불확실한 상태에, 오늘도 나는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요 몇 달간 전에 없는 네덜란드 사회의 흔들림을 경험하며 나 역시 때로는 예민했고 때로는 우울했고, 또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계기도 일상의 즐거움과 소중함을 느끼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M과 공식적인 부부가 되는 엄청난 과정을 거쳤다.


바라건대 3개월 뒤 이 글을 읽을 때는 '그땐 그랬지' 라며 코웃음을 치고 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중이라면 좋겠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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