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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Apr 16. 2021

여섯 살 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네덜란드어 까막눈의 하소연 2


네덜란드어 A2 레벨이 뭘까. 


나는 올해 5월 말,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달 안에 A2 레벨에 도달하는걸 목표로 공부중이다.

유럽연합은 CEFR(Common European Framework of Reference for languages) 로 언어구사능력 단계를 통합해놓았다. 스페인어든 독일어든 네덜란드어든 이 통합 레벨에 맞추어 수준을 규정한다.

초급 A 레벨, 중급 B 레벨, 고급 C 레벨 세 단계 안에 숫자로 세분화 되어있다. (자세한 설명은 이 웹사이트 https://www.coe.int/en/web/common-european-framework-reference-languages/table-1-cefr-3.3-common-reference-levels-global-scale 에 나와있다.)



CEFR 기준을 설명하는 그림. image from coe.int





A2 레벨이 무엇이냐, COE 공식 웹사이트에 나온 규정이다. 


기본 인적사항, 쇼핑, 동네, 직장 등 본인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들과 관련된 문장/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말을 중간에 잠깐 멈추거나, 실수를 하거나, 문장을 재구성을 하는 경우가 잦지만 매우 짧은 발화로 본인이 말하는 바를 이해시킬 수 있다.


-간단한 질문에 대답과 응대가 가능하지만 그 질문에 이어서 스스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힘들다. 



저 A2 레벨의 규정은 그야말로 점쟁이가 만든것인게 확실하다. 아주 정확하다. 

배운 분들이 만드셔서 부드럽게 순화시키긴 했으나, A2 레벨을 솔직하게 정의하자면 '다섯살, 여섯살 정도의 언어 구사 능력'일 것이다.


'나는 오늘 밥을 먹었다. 소세지가 참 맛있었다.'


'어제 날씨가 추웠다. 그래서 집 안에 있었다.' 


'오늘은 동화책을 읽었다. 참 재미있었다.'



나는 지금 이런 문장을 만드느라 머리가 빠개지고 있는 것이다. 

아 응애예요!







일상 생활에 흔히 쓰이는 단어들을 이해하고, 아주 간단한 문장을 쓰고 말할 수 있지만 문법적으로 실수가 잦은 수준. TV 광고처럼 직관적인 콘텐츠를 대충이나마 이해하는 수준. 잠깐 머무는 관광객이나, 쇼핑하는게 전부인 '고갱님'으로 평생 살 생각이라면 아주 힘들진 않을 그런 수준. 


그것이 A2의 수준이다. 내 일상 생활을 반추해보니 정말 A2 다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1. 슈퍼나 레스토랑에서 90% 정도 더치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종종 '그 물건은 어떤 카운터에서 가져왔나요' 나 '오늘의 특별 메뉴에 뭔가 추가하고 싶은게 있나요' 같은 기출 변형이 나오면 말문이 막힌다.
2. M의 부모님께서 더치로 질문하시면 알아들을 순 있고 단답형으로 대답이 가능하지만, 결코 대답 이상으로 대화가 나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무수한 문법적 실수가 발생한다. 
3. 가족오락관처럼 손짓 발짓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한다.




8년이나 네덜란드에서 살았는데, 다섯살 수준의 회화도 못하는 내가 너무 괘씸하지 않은가? 


물론 개인적인 이유를 대기 시작하면 구구절절 판소리 한 편이 뚝딱 나온다. 

상상을 초월하는 미대 과제량을 소화하기도 벅찬데 언어 공부를 할 시간이 어디 있으며, 나는 영어 원어민도 아니고, 논문도 영어로 써야 하고, 친구들은 90% 외국인이고, 어차피 학교에서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다 영어를 쓰고 있었고, 일 할때도 영어를 사용하고, 크리에이티브 업계는 네덜란드어 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게 훨씬 이득이고, 졸업을 하고 네덜란드에 살 생각이 아니었고, 한국어와 영어와 네덜란드어의 어원적 거리감 기타등등 기타등등 뭐래니.


하지만 정말 시간이 없었을까? 방학때 조금이라도 공부를 할 수는 없었을까? 집에 와서 넷플릭스로 프렌즈를 볼 시간에 더치 공부를 했으면 이런 수준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루에 10분 이라도 꾸준히 공부를 했으면?


 '네덜란드에 언제 왔니' 라는 질문을 들을때마다 나는 약물을 먹은 지킬 박사마냥 괴로워했다. 지킬은 변명의 방패를, 하이드는 후회의 칼을 들고 내 맘속을 헤집어놓았다. 


그러나 최근 깨달은 게 있다. 내가 굳이 계속 영어를 쓴 것이 단순히 게으름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 나라에 혼자 살면서 '얕보이기' 싫었던 것 같다. 네덜란드 어를 쓰는 나는, 영어를 쓰는 나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내 나잇대에 맞는 수준으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영어를 잘한다고는 해도 결국 그들에게도 '외국어' 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다. 심지어 때로는 내가 더 낫기도 하다. 하지만 네덜란드어를 쓰는 순간 그 무게축이 어마어마한 각도로 기울어버린다. 나는 순식간에 '실제 나이가 어떻든 당장 쟤가 구사하는 어휘력의 수준은 어린애에 불과한', 온전치 않은 성인이 되어버린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생각보다 다수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본인보다 '약한지 강한지'를 판단한다. 그런 사람들이 타인을 얼마나 쉽게 물어뜯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불시에 공격당했을 때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지, 해외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개념적으로든 실제로든 겪어봤을 것이다. 게다가 그 공격은 항상 '공격적'이지 않다. 수동적인 공격이 훨씬 더 짜증날 때가 많다. 그저 눈빛이나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바보가 아닌 이상 느낄 수 있는 '그 느낌'이 있다. 나는 그 애매한 느낌이 정말 너무 싫었다. KABK에 갓 입학했을 때 파리로 모든 학년 학생들이 여행을 갔는데, 그때 버스 안에서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윗 학년 더치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뭐야, 쟤는 영어를 왜 이렇게 잘해?' 바꿔 말하면 그건 '나는 저런 '특정 인종'이 영어를 저정도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걸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좋은 의도였든 뭐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장차 살아야 했던 네덜란드에 대한 부정적인 한 켠을 감지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네덜란드는, 이런 소소한 사건이 방심하면 터지는 곳이다.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과거의 나는 외로운 가운데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이젠 그런 내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던질 차례다. 

당장 5월 말에 시험을 쳐야 하니까.








한국에서도 아마 8년 산 외국인이 영어만 쓰고 산다면 뒤에서 욕을 들어먹을 것이다. 한국어를 배울 생각이 없냐고. 하지만 애초에 뇌에 클릭이 안되고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흩어지는 언어도 있다. 신촌 롯데리아에서 꿋꿋하게 영어만 쓰며 알바생의 하루를 괴롭게 만든 그 얄미운 외국인도, 자기 집에 도착해서는 한국어 교재를 붙들고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국의 친구와 페이스타임을 할 것이다. 나는 이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도 유아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본인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지 않겠나. 


지금 내 옆에는 내가 딱 다섯 살 때 읽었던 독일 동화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이 있다. 어릴때 한국어로 읽었던 독일 마녀 동화를, 이제 다시 네덜란드 어로 더듬더듬 읽는다. 지금의 내 모습이 더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 하루 더치를 공부하고 있다. 서른 일곱 살의 나, 이제는 제발 여섯 살 처럼 말할 수 있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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