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수치심을 먹고 삽니다.
시간은 죄책감을 먹고 살며, 적당한 합리화를 위해 삽니다. 적당한 합리화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실수를 반드시 저지릅니다. 그 실수는 대체로 무마할 수 없기에 인간에게 치명타를 남깁니다. 인간은 그 실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배우거나, 사실을 부인하다 정신병이 찾아옵니다.
초반에는 그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믿고 싶지 않아 합니다. 정확히는 '남'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해버렸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 합니다. 이건 당연히 남이 저질렀으므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방관하기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이어야 하는데 나의 현재와 미래 그 모든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부정적인 감정이 치솟습니다.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용서할 수 없으므로 계속해서 부정합니다.
부정할수록 그 사실은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은 더 짙게 남을 뿐. 짙어진 그림자로부터 오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하루를 보내고 이틀, 사흘을 보내고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쩌다보니 강박처럼 머릿 속에 새겨진 실수를 저질렀던 상황을 되풀이합니다. 되풀이 할수록 심박수가 들뜨는 부분은 더 깊게 새겨지고, 본 내용은 왜곡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려서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게 됩니다. 무력감과 함께 죄책감과 수치심은 더해져만 갑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상황이 지속될 경우 불쾌의 감정인 불안감을 느끼므로 합리화를 합니다.
원래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다고. 나의 행동은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불합리하다고. 내 탓을 하면 내가 괴롭기 때문에 나를 탓하지 않고,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상황 속 상대의 행동을 탓합니다. 아니면 그 사람의 성격을 탓합니다. 나의 행동에 그런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그릇된 성격을 치열하게 헐뜯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상황이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럴 만한 심리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합리화를 하고 난 인간은 지쳐버리고 맙니다.
애초에 내가 무엇을 위해 이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피하고만 싶은 덩어리를 없애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원자의 크기가 되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까지도 나는 이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불쾌한 감정의 골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치유되리라고 믿어야 할까요.
그러나 시간은 인간의 상처를 먹고 살지 않습니다. 시간은 죄책감도 무력감도 수치심도 먹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의 목줄을 잡고 끌고 갈 뿐입니다. 그렇게 바닥에 끌려가다 닳아버린 나머지 가루가 된 세 가지 감정은 시간의 발자국에 그 흔적을 남깁니다. 그렇게 살아가도 시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합리화 또한 시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제깍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휘감고자 하는 짓거리가 합리화이니까요.
이 순간 견디는 존재는 인간 뿐입니다. 시간은 그 무엇도 견디지 않고 그 무엇도 먹고 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인간은 흘러가고야 맙니다. 지금 내 눈 앞에 놓인 커다랗고 드높은 장벽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해봐도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며칠 뒤에 그 장벽을 어떻게든 지나 마저 길을 걸어가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믿고 그 속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비로소 행하는 일이야말로 시간을 견디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