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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람 Jun 29. 2024

직감은 끝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하(下)

 

 마음에 두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짐했다. 너의 나라에 가야지. 너의 고향에 가서 귀여운 강아지와 너의 남동생과 인사를 나누고 차를 타고 멋진 해안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자고 해야지. 여기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진솔하고 어쩌면 너를 웃길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마음껏 저질러야지. 그럴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야. 한 번 불이 오르기 시작한 냄비는 잠잠해지는 법을 까먹은 듯했다. 네가 건네는 한 움큼의 마중물도 없이 어떻게 마음이 이렇게까지 커질 수 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도 들어있지 않은 냄비에 붙은 불은 곧 흥미를 잃었다. 슬픔, 원망, 질투, 시기, 미움로 난도질 된 장작은 더 이상 제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도 밥도 되지 않은 채 달달 볶이던 텅 빈 냄비는 그 비수같은 눈물에 순식간에 잦아들고야 말았다.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를 쓰려면 밑바닥을 박박 긁어내야 한다. 그 말인 즉슨, 그 애에 대한 생각을 아득바득 긁어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멍청한 뇌를 가진 나는 팔다리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더 흥미롭고 경이로운 경험으로 가득 찰 나의 세계에 희미한 탄내가 묻어나와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그 애를 향한 감정에 긍정적인 해석 따위는 없었다. 어떤 기억끼리 엉키고 설켰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덩어리진 까만 잔해들은 본래의 색 따위는 잃고 말았다. 어쩌면 미련 없이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하게 일그러져버린 모습은 고요한 파도를 불러일으켰다. 파도는 모든 걸 휩쓸어가고 마니까.









  파도자국이 남은 자리는 여전히 무언가로 가득했다. 네가 너의 고향으로 떠난 세상은 별다를 게 없었다. 네가 없다는 것만 빼고나면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첫째 날, 그리고 서슴없이 맞이한 둘째 날. 늦은 저녁을 먹던 나는 문득 네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기억났다. 미련이라기엔 가볍고 농담이라기엔 진중했던 그것은 기어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제는 아니야."



  다 보였을 테다. 못 알아챘을 리 없다. 그래서 너는 착하지만 이기적이고 못됐다는 말이나 듣는 거야. 왜 모른 척 했는지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애초에 모르는 척이라는 행동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내가 유별나게 기민했던 탓이 아니었다.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네 마음이 아까워. 그 말을 왜 떠나보내고서야 깨달았던가. 인간은 책임져야만 하는 당사자가 되어서야 깨닫고야 마는 자기중심적인 존재이다. 내 마음이 아깝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너의 나라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그 말만은 해야 했다.


 

 "너는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초록색이 잘 어울렸다. 나무와 풀을 볼 때마다 그 자리에 더 머무르곤 했다. 토끼를 좋아했다. 토끼 인형을 볼 때마다 괜히 더 눈길이 갔다. 크로아상을 좋아한다고 했다. 빵집에 갈 때마다 크로아상이 있는지 두 번씩 확인하고는 했다. 바다를 좋아했다. 바닷가에 발을 디딜 때마다 네가 곁에서 활짝 웃고 있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리고. 네가 뭘 더 좋아했더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너를 연필 자국처럼 그려내는 일은 온몸을 떨게 한다. 네가 좋아하는 홍차를 끝의 끝까지 우려내듯. 기어이 쓴맛이 단맛을 덮어버려 뱉어버리고야 말 듯.



  때로는 어떤 끝은 끝이라는 말 없이도 맞이하고야 만다. 나의 경우에는 연락이 그러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 그 애의 연락은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연결되지 않아 삐-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니. 그렇게 쌓이고 쌓인 내 마음은 무덤이 되고, 묘비가 세워진다면 그 비석에는 그리움의 변주가 새겨질 것이었다. 내 무덤에 자라난 풀과 꽃 따위를 보고 그 애는 '안녕'이라며 인사부터 건넬 테다.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나를 예의껏 떠올리며 '쟤는 꽃을 좋아했지'라고 생각할 테다. 그런 너를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사마저 너 답다고 눈살을 찌푸리고야 마는 나를 기억이나 할까. 



  네가 이곳을 떠나기 나흘 전, 너는 내 편지를 받고 예상치 못했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건네 준 편지 고맙고, 꼭 이곳을 떠나기 전에 읽겠다고. 사흘 뒤 내 생일이었던 그 날. 그러니까 네가 떠나기 하루 전 날, 또 한 번 너는 내게 이야기했지. 떠나기 전에 읽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가면서 읽겠다고. 그런데 네가 떠나고 사흘 뒤, 너는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네가 남겨준 메시지와 함께 내 편지를 읽고 답장을 주겠다고.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곧이어 육성으로 크게 웃고 말았다. 애초에 읽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깟 편지 단면 2장을 읽지 못할 정도로 바쁜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아니 그 누구라도 누가 준 편지든 5분, 10분 시간을 내어 기쁜 마음으로 읽었을 텐데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큼 몰지각한 사람이었던 거지, 너는. 나는 그걸 어떻게든 정성스럽게 읽고자 하는 상냥한 너로 멋대로 곡해했을 뿐이었고. 꼴이 우스웠다. 동시에 나는 내가 불쌍해서 울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너를 생각하며 울고 싶은 나를 위해 나올 눈물은 가뭄이 든지 오래였다.








  그 애가 내 가시거리에 있지 않게 된 날로부터 3개월이 지났던 그 날, 그 애는 여전히 내 편지에 답장이 없었고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물리적인 공포가 아니었다. 어떤 한 존재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수준의 공포도 아니었다. 이미 나에게서 명왕성까지의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내가 떠올리는 모든 문장 끝에 네가 매달려버리면, 어떡하지. 민들레 씨앗처럼 후- 불어버리면 그만이고 가지 끝에 달린 열매를 톡-하고 떼어나면 그만인 공포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의 여부와 상관없이 증식하고야 마는 너의 잔재들이다. 그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나의 전두엽 한 쪽 구석의 자그마한 발자국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이제는 탄내도 나지 않고, 엉겨붙은 덩어리들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간다. 지극히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선수를 친 쪽은 그 애였다. 내 뇌의 고랑 곳곳에 지뢰를 숨겨놓았다. 어떤 기억이 나든, 무엇을 보고 느끼든 자신을 떠올리게끔 비겁한 수를 쓰고 평온하게 숨어버렸다. 


  그리고 나와의 약속은 지난 번 불길에 함께 태워버린 듯 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일상이 시시콜콜한 나머지 SNS를 켰고, 드물게 네가 새로 올린 사진이 있었고, 나는 보면 안 될 사진이라도 본 듯 사진 속 대상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기어코 그 사진 속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서 듣고 말았다. 네가 웃고 있었다더라. 절망이 자리해야 할 빈 공간에는 분노가 한순간에 박차고 들어와 타올랐다. 끝까지. 끝까지.








  너는 쉽게 뱉고야 말던 모든 말들이 나에게는 꾹꾹 눌러쓴 나머지 자국이 남아버린 인용문이었다. 내가 떠올리는 모든 것들에 네가 없는 구석은 없었다. 진부하고, 구차하지. 어딜 가도 네가 있었고, 어디에도 네가 없었다. 그래서 자국을 지울 수조차 없어져버린 지금은 너를 어떤 식으로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답장을 주겠다던 편지는 대체 언제 오는 건지,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더는 기다리지 않아. 기다림은 기대를 동반하지. 그 기대가 사그라들면 기다림은 자취를 감추고, 흔적을 지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직감은 네가 내게 인생에서 놓치면 후회하고야 말 중요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그 존재가 불러올 이러한 끝도 예상하고야 말았다. 





내가 너에게 줬던 손편지는 버려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야 말 것이다. 





자취를 감춰버린 기다림에 맞춰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이제는 옅은 박수 소리와 함께 내 인생에서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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