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사람 Jul 06. 2024

어떤 말

1부





  어떤 말은 말 그대로 이루어지길 소망한다기보다는 말이 향하는 대상 자체를 뇌리에서 없애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 죽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죽음을 상상하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불쾌할 뿐만 아니라 나쁜 일임을 안다. 모를 리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함부로 떠올리면 안 된다고 배웠다. 모든 이의 죽음을 아울러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경시하면 안 된다고. 그럼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소원한다는 말은 죽음이 가장 손쉽고도 불가능한 정답임을 알았을 때이다.




-




  누군가의 죽음을 처음으로 생각했던 나는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화목한 가정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 겨를도 없이 나는 평범한 가정의 차녀로 태어난 지 10년은 족히 지난 아이였다. 눈을 감으면 엄마가 사라질까 불안해하면서도 눈을 뜨고 나서는 그를 미워하고 그의 애정을 갈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하릴없이 현실적인 공상에 매달렸다. 엄마가 이 집을 떠나면 안 되는데. 엄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리고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엄마는 건너편 큰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음에도 나는 어쩔 수 없이 흐르고만 눈물을 닦고 움츠러들어야 했다. 일어났을 때 엄마가 숨을 쉬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 씨가 되지 않도록 입을 다 물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자연스레 이런 상상은 잊히기 마련이었다. 이게 10살 인생 최대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와 함께 걸어서 30분 거리의 이모네 집으로 도망쳤던 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아빠의 삼촌, 그러니까 그 어린 나이에는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 우리 네 가족이 살던 집으로 찾아왔다. 이상한 사람이 왔다고 생각하라면서 이모네 집으로 가 있으라고 엄마는 말했었다. 버스를 타고 가라고 언니 손에 5000원이나 쥐어주셨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기쁨을 표출하면 안 되었던 그 상황을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계단을 올라 벨을 누르자 이모는 자연스레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소파에 앉히고 삶은 계란을 건네주셨다. 이모는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에 살지만.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 나와 언니는 그 사람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그날 저녁, 나는 아빠한테서 책임져야 하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를 배웠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알고도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방으로 도피하여 궁지에 몰리면 언성을 높여 엄마에게 쌍욕을 퍼붓는 태도. 그 어떤 일도 해결하지 못한 채 자신의 나약함만 드러내는 어리석은 방식이었다. 그는 무기력한 만큼 무능했고,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언니 나이만큼 묵은 삼촌과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려 했다.



  우연히 본 언니의 일기장에는 아빠가 제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를 몽둥이로 팬 적은 없지만, 우리에게 미쳤냐느니 돌았냐느니 쌍욕을 퍼부은 적은 없지만, 그저 죽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문장을 본 순간 종잇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다음 화장실 변기물에 따라 내려버렸다. 나도 아빠가 싫지만 막상 글자로 마주하고 나니 두려웠기 때문이었고,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엄마가 언니를 쫓아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그동안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했음을 자각한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내가 죽는 것도 아니고, 남의 죽음을 상상하는 데만 해도 이렇구나. 죄를 지은 듯한 기분에 나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야구 생중계를 보고 있는 아빠를 문 너머로도 보지 못했다. 엄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로 의식적으로 남의 죽음을 생각하기를 관뒀다. 그 대신 죄책감 따위는 지울 수 없는 나의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죽음을 남몰래 빌다가 나의 끝을 꾸려나가기 시작하니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거부감도 없었다. 어쩐지 남에게 이걸 털어낸다 해도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바꿀 수 있는 것보다 바꿀 수 없는 게 훨씬 많았던 환경에서 내가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내 목숨이었다. 학교와 학원을 마치고 남는 시간의 8할을 어떻게 죽을지 생각했다. 베란다에서 떨어질까, 도로 위를 지나가는 차에 갑자기 뛰어들까, 계단을 등지고 머리부터 떨어뜨려버릴까, 어쩔까. 어떻게 하면 나는 찰나에 죽어버릴 수 있을까. 이왕 세상을 뜰 것이라면 고통 없이 한 번에 끝내는 편이 나았다.



  나는 언니만큼 똑똑하진 않았지만 집요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죽이는 방법을 고스란히 일기장에 적지 않는 법을 몰랐고, 그러다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고 위험가능성이 높아 부질없다고 느낄 때쯤 관두었다(그렇다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방을 청소하던 엄마에게 숨겨뒀던 일기장을 들켜버렸다. 10대 초반의 아이가 써봤자 얼마나 상세하고 현실적으로 썼을까 싶겠지만, 나는 꽤나 진지했고 엄마도 내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날 나는 하필이면 학원을 빼먹었고, 아빠는 야근을 했으며, 학부모 모임에 다녀와 잔뜩 비교당한 채 기분이 상할 때로 상한 엄마와 현관에서 단 둘이 마주쳐야 했었다. 뒤이어 들어온 언니가 엄마를 말릴 새도 없이 나는 책가방을 빼앗겼고, 필통 안에 있던 문구용 커터칼에 엄마는 기함했으며 내게 미쳤냐는 폭언을 퍼부었다. 머리를 울리는 손찌검은 눈물 나게 자연스러웠다. 네가 진짜 미친 거냐. 어쩌자고 어린애가 죽음을 생각할 수 있냐. 내가 너한테 뭘 못 해줬다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저들이 나에게 못 해준 게 뭐지.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정신이 들었냐고 하면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소란은 쉼 없이 지지직거리는 라디오의 소음이었다. 나는 내 주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듣기 싫었다. 주파수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제정신인 척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엄마는 나를 향한 울부짖음을 거두어들였다.



  그날 저녁, 내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 들고 방으로 찾아왔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말의 변주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미움을 견딜 수 없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