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웅 Sep 24. 2020

악령과 인간의 본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을 읽고

악령과 인간의 본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악령’은 누가복음 8장 32-36절로 운을 띄우며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열린책들’ 판에 나온 대로 공동번역을 따랐다.


| 마침 그곳 산기슭에는 놓아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 (악령)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마귀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주었다. |


본문에 등장하는 ‘마귀’라는 단어는 성경 번역에 따라 ‘귀신’이라고도 표기된다. 영문으로는 ‘demon’ 아니면 ‘devil’로 번역된다. ‘열린책들’에서는 소설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살리기 위해 ‘마귀’에 ‘악령’을 병기했다. 나 역시 이 감상문에서는 ‘악령’이라는 단어로 통일한다. 참고로 이 작품의 러시아 원서 제목은 ‘Besi’, 영문 제목은 ‘The possessed’, 'Demons', 혹은 ‘The Devils’이다.


성경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악령의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그리고 이를 호령하고 제어하는 예수의 권세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 의거하면, 악령은 바이러스처럼 숙주를 필요로 하며, 숙주를 옮겨 다닐 수 있다. 숙주는 사람일 수도 돼지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즉 사람을 홀리고 장악하는 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혼란과 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전파 및 확산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궁극적 파멸로 이끈 뒤 자신은 살아남아 또 다음 기회를 노리는 힘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이 책의 감상문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처음엔 단순한 궁금증이 있었다. 왜 이 성경본문인가? 그저 악령이 등장하기 때문인가? 악령이 등장하는 본문은 여기 말고도 다른 복음서뿐 아니라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왜 하필 이 본문인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답을 얻지 못했다. 마지막 페이지인 1097 페이지에 도달하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건만, 게다가 읽었던 곳을 읽고 또 읽고 하면서 다른 책보다 더 힘들게 읽어냈건만, 나의 이해는 여전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틈틈이 읽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재구성해보던 중, 어젯밤에야 비로소 실마리가 잡혔는데 그것은 전율과 함께 내게 갑자기 다가왔다. 계속 봐서 식상해진 글이 여태껏 숨겨왔던 의미를 마침내 드러낼 때 느낄 수 있는 그 소름 돋는 전율.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이 성경본문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용기가 났다. 이 성경본문으로 이 대작을 조금이나마 풀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작품은 감상문을 쓰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작품이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고, 그래서 그냥 포기할까 여러 번 고민했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누가복음 인용 용도와 목적을 중심으로 해서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풀어가다 보면, 비록 졸작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대가의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 Possessed: 먼저, 소위 ‘귀신 들렸다’라든지, ‘귀신에게 홀렸다’, 혹은 ’사탄에게 잡혔다’라고 표현되곤 하는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이 소설의 콘텍스트에서 악령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첫 번째 숙주 관점에서 접근해본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1869년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한 달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스끄보레쉬니끼 등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안똔 라브렌찌예비치'라는 사람이 기록한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연대기적 회고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시점이 평범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소설 전체에서 볼 때,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는 소설의 화자가 실제 말도 하고 사건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는 인간 관찰자가 맞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전지적 작가 입장도 취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이 책의 본문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라는 인물의 짧은 연대기로 시작한다. 소설 전체에서 스쩨빤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으로 등장하지만, 화자는 일부러 그의 젊은 시절을 간략히 연대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설의 서론을 대신한다 (이 소설의 화자 안똔은 스쩨빤의 가장 친한 젊은 벗이다). 왜일까? 왜 스쩨빤의 과거가 이 대작의 서론으로 자리 잡아야만 했을까? 스쩨빤은 중요 인물이긴 하지만, 주요 사건을 일으키거나 상황의 전면에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기력이 쇠한 노인네 아닌가). 화자가 밝히고 있는 이유에도 특별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저 뜬금없이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최근에 일어난 아주 이상한 사건을 기술하기에 앞서 약간 멀리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말을 하며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화자가 아닌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이 소설을 악령의 존재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서론은 악령의 기원이라든지 아직 땅 속에 묻힌 채 발아를 기다리고 있는 악령의 씨앗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누가복음 본문에서 악령이 처음엔 돼지가 아닌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듯, 스쩨빤도 이 소설의 콘텍스트에 있어서는 악령 들린 첫 번째 숙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장장 천 페이지를 넘는 이 대작의 서론이, 조금은 뚱딴지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스쩨빤 한 사람의 전기로 대체되어야만 했던 게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와 그 미미한 시작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본다. 19세기 러시아 철학과 사상은 1840년대와 1860년대로 구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뚜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1840년대 세대를 ‘아버지 세대’로, 1860년대 세대를 ‘아들 세대’로 나눈다. 역사를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경솔한 시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구분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는지 여부를 떠나, 두 세대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가시적이자 상징적이었다고 보았다. 1840년대 러시아에는 서구의 자유주의가 물밀듯 들어와 있었다. ‘인텔리겐찌야’라고 불리는 러시아 특유의 지식인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는데, 각각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양분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스쩨빤은 1840년대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서구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입만 열면 프랑스어를 남발했고, 러시아 역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현실감을 상실한 이상주의자로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1821년생이며 1881년에 타개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두 세대를 모두 직접 함께 한 장본인으로서, 이 소설의 주배경이 알렉산드르 2세가 1861년에 시행한 농노 해방령이 발효된 후 민중의 분노가 극에 치달았을 1869년인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 세대의 결코 안정하지 않았던 서구 자유주의의 급 기류가 아들 세대로 하여금 결국 피를 흘리게끔 만든 악령의 씨앗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즉, 1860년대 말에 있었던, 혁명이란 옷을 입은 광기 어린 폭동을 일으킨 아들 세대에게 안착한 악령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저자는 고발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마치 악령이 사람에서 돼지로 옮겨간 것처럼 말이다.


2. Moving to enter: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죽지 않고 영원한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말하자면 두 번째 숙주 관점에서 풀어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미처 다 읽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 책의 창작 배경이 그 유명한 '네차예프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임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급진적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네차예프는 1869년 모스크바에서 '민중의 복수'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조직원 중 하나였던 '이반 이바노프'라는 사람이 그의 방법론에 반대를 하며 조직을 탈퇴하려고 하자, 네차예프는 동료 4명과 함께 이바노프를 살해해 버린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러시아에 팽만했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필두로 했던 극단적이고 광적인 혁명 운동을 상징하며, 혁명 세력의 비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을 접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정치 풍자적인 내용의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었고, 그만의 독특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또 심리학적이기까지 하면서 야생마처럼 결코 다듬어지지 않은 그만의 총천연색 필체가 가미되어 이 책 '악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실제 작품 안에서도 '네차예프 사건'은 거의 그대로 모방된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 나오는 일련의 흉측한 범죄 중에서도 정점을 찍는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살해 수단이 총이었다는 것, 살해 장소가 인적이 드문 연못 근처였다는 것, 시체를 연못에 빠뜨려 유기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이 다 밝혀졌다는 것까지 모두가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는데, 나는 이 차이점에 착안하여 저자의 숨은 메시지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네차예프 사건'에서는 범죄를 주동한 네차예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이후 종신형으로 대체되어 투옥 8년 만에 병사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 소설에서 네차예프 역을 맡았던 '표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 (스쩨빤의 성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 표뜨르는 스쩨빤의 아들이다)는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공범과는 달리 홀로 잡히지 않고 도주하여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표뜨르는 표면적으로는 네차예프처럼 혁명을 일으키길 원하는 자처럼 그려진다. 적어도 그가 입김을 지속적으로 불어넣고 있는 조직원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네차예프와의 공통점은 아마도 공모하여 살인을 주도했다는 점 빼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네차예프는 당대 유명했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의 지원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조직을 결성하는 등 실제 혁명을 일으키려는 자였지만, 표뜨르의 경우는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뤄내자고 하는 겉으로 포장된 선전과는 달리 실제로는 혁명이 아닌 혼란만을 야기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인 지원자도 없었고, 훈련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재하는 조직조차도 없었다. 오로지 거짓과 위선으로 무장하여 경솔하고 간사하며 비열하고 뻔뻔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인조라는, 실재하지도 않지만 조직원들은 실재하는 것처럼 믿는, 오합지졸 같은 조직을 충동질하여 계획한 범죄를 깔끔하지 못한 방식으로 기어이 저지르고야 마는 악령의 실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죽거나 파멸당한 자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를 제외한 악령의 두 번째 숙주는 누가복음 본문의 돼지 떼가 몰살당한 것처럼 모두 희생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표뜨르 개인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저질러졌던 것이다. 그렇다. 그건 혁명이 아니라 범죄였다. 그 범죄는 혼란이었다. 불이 났고 폭동이 일어났고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혼란 야기는 충분히 성공했다. 마치 마귀 새끼 한 마리가 분탕질을 해놓고 도망친 것처럼,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들고 저 혼자만 내뺀 것처럼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표뜨르를 살려두었을까. 아마도 악령의 존재방식에는 절대 끝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악령의 불멸성을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저 잠복기와 휴지기, 그리고 활동기가 구분될 뿐 악령의 존재 자체는 그 어떤 모습으로든 영원하다는 것을 상기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3. Spiritual existence: 또 다른 축,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해본다.


여태까지 이 소설의 주인공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본문의 악령의 존재방식에 착안하여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표뜨르와 5인조로 대표되는 아들 세대로의 악령의 숙주 이동은 그 자체로써 독립적이고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이 구조로만 이루어졌다면, 그리 난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표뜨르를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따브로긴이라는 인물을 대신 등극시켰다. 그는 이 때문에 작품을 전면 개정하는 수고를 더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작품은 두 개의 축을 가지게 되었다. 두 축은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복합적이고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져왔는데, 어쩌면 이것이 이 작품을 대작으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일명 스따브로긴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축은 악령의 존재방식이라기보다는 악령의 습성 내지는 성품을 말해준다고 나는 보았다. 그는 비록 어릴 적 스쩨빤의 영향을 잠시 받은 적이 있고, 해외에 머물 때 표뜨르와도 관계를 잠시 맺었지만, 다분히 독립적인 이미지로서 이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모든 어두운 힘의 움직임에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며 관여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저열한 모습으로 혼돈을 불러일으킨 악령의 행동대장 표뜨르가 선택하고 유일하게 우상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야심 찬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스따브로긴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우월함과 언제나 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이미지, 일탈을 일삼고 나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언제나 고독과 우수에 차 있는 그의 이미지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졌으며, 표뜨르를 포함한 주위 모든 사람들이 스따브로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나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건의 전면에 나서서 악령의 더러운 손과 발 역할을 했던 사람은 표뜨르였지만,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모든 사건의 배후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사람은 스따브로긴이었다. 어쩌면 표뜨르는 스따브로긴 한 개인 안에 들어있던 악령을 외부에서 증폭시킨 역할을 담당했던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이동이 아닌 악령의 영향력을 저자는 스따브로긴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굳이 숙주를 이동하는 수고로움 없이도, 거짓과 위선과 사리사욕에 눈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마치 악령이 거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악령의 힘을 묘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표뜨르를 움직인 건 어쩌면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이동된 악령이 아니라, 그 악령을 섬기면서 그에 의지하여 표출하고자 애쓴, 한낱 가련한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악령은 어쩌면 어떤 초월적인 인격을 가진 제3의 영적 존재가 아니라, 탐욕과 거짓과 위선과도 같은 인간 스스로의 내밀한 본성일지도 모른다는 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간의 참담한 실체, 그 어두운 심연의 그림자를 가감 없이 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 유무를 논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나는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고 싶다. 악령을 원망의 대상이나 핑곗거리로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말이다. 악령을 탓하는 행위가 당면한 문제의 이면에 있는 영적 실체를 인지하여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 꿇고 마음을 낮추는 자세를 가져온다면 좋겠지만, 탓하는 그 행위에서만 머물며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상황을 초래한다면 악령의 존재를 차라리 부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악령 탓만 하는 행위 자체가 악령이 가장 원하는 것일지. 그게 바로 악령 일지.


한 달간 이 책을 읽어나갈 때도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독특한 필체 덕분에 정신이 없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정신없기는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의 그 길고 긴 이름은 부수적인 스트레스일 정도다. 워낙 방대하고 심층적인 소설이라 해석 자체가 어려웠다. 아직도 난 이 작품을 얼마나 소화했는지 감도 잡을 수가 없다. 역사에 길이 남을 니체를 포함한 철학자들 뿐만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자, 신학자, 그리고 기타 여러 사상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이나 ‘백치’와는 또 다른 맛의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렇게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조잡한 리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의 글이 기라성 같은 이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이전 02화 누가 백치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