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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Sep 26. 2020

헤세와 다른 맛의 성장소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미성년'을 읽고

헤세와 다른 맛의 성장소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미성년'을 읽고.


헤세를 읽으면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자아의 분열과 대립마저도 점진적인 합일로 나아간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정도로 난잡하고 추잡한, 그러면서도 세밀하고 농밀한 인간 심리 묘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헤세를 읽고 나면 무언가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모이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나면 벌거벗겨지고 더욱 파헤쳐지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자칫 불쾌할 정도의 씁쓸한 기분까지 들기 때문에 그런 감정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나기가 쉽진 않다. 가끔은 정말이지 깔끔하게 목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비록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인간의 절망과 악함의 심연 가운데에도 소망과 사랑과 구원이 깃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렬히 보여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헤세가 절제되고 상대적으로 우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보다 낮고 어두운 길이 여러 갈래로 나있으며, 전혀 정돈되지 않아 어지럽고 복잡한 야생의 숲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밀한 심리의 민낯을 대면하거나 탐구해보고 싶다면, 반드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다시 말해, 보고 싶은 것만이 아닌 언젠간 볼 수밖에 없거나 반드시 봐야만 하는 추악한 것들도 버젓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도 읽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읽는다면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당신은 분명 다를 것이며, 나의 이러한 권고를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묘한 매력을 맛보았다면, 아마 나처럼 다른 작품들도 접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네 번째 장편소설인 ‘미성년’에서 나는 헤세의 냄새를 맡았다. 이 책 '미성년'에서는, 이미 읽은 세 편의 장편소설, 즉 ‘죄와 벌’, ‘백치’, ‘악령’, 그리고 곧 읽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른 느낌의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이렇다 할 만큼 강한 임팩트를 주는 서사가 부재하다. 또한, ‘죄와 벌’과 ‘악령’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념과 사상의 의인화’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보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독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작업을 통해 '아르까지 돌고루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청년 (미성년)의 성장기를 다루는, 그래서 헤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작품이다.


임팩트 있는 서사의 부재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건의 부재다. 그래서 누군가가 줄거리를 말해달라고 하면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딱히 뭘 말해줘야 할지 난감하다. 커다란 사건들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은밀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복선을 알아차리며 느끼는 전율과, 마침내 사건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끽할 수 있는 스릴이 고스란히 이 책에서는 주인공의 생각 흐름과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른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천 페이지를 육박하는 작품이니, 이 책 '미성년'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 내면 심리에 중점을 두었는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헤세의 성장소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의 성장소설이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미성년'은 '아르까지 돌고루끼'의 자서전적 수기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바로 그 '미성년'이기도 하다. 즉,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돌고루끼를 통해,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현실과 이념 사이에서 부유하는 한 젊은 청년의 방황을 그려내고 있다. 모든 소설에서 작중 화자는 언제나 저자의 분신이다. 화자와 저자가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화자는 저자의 모습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특히 이 책처럼 거의 천 페이지 분량으로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면서 어찌 저자의 영혼이 화자에게 담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찾아보니,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서전적 소설로도 불린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미성년'이라는 제목이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진 건 화자인 돌고루끼에게 부여된 특성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돌고루끼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가진 고독한 이상주의자도 몽상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치'에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처럼 순수한 인간미를 간직한 인물도 아니며, 미쉬낀 공작과 대비되는 로고진처럼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물도 아니다. 또한, '악령'에 등장하는 표뜨르처럼 인간의 탈을 쓴 악령의 모습도, 스따브로긴처럼 모든 사건의 배후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처럼 그려지는 인물도 아니다. 돌고루끼는 그저 미성년이다. 설익은 채로 마치 어른인 것처럼 행동하는 인물이랄까. 성년이 아니면서 성년인 것처럼 보이려 하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미성년인 존재가 바로 돌고루끼인 것이다.


워낙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장황하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에, 이 책의 주를 이루는 돌고루끼의 독백이 장황하다는 점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젠 그의 장광설과도 같은 필체를 보면 오히려 익숙하고 반가울 정도다 (사실 이 책의 초반부부터 의외로 나는 빨려 들어가며 읽어낼 수 있었고, '악령'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속도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다른 장편소설 주인공들의 독백이나 그들을 묘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돌고루끼를 묘사하는 필체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그것들과는 달리 명료하지 않고 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록 돌고루끼 스스로는 자신만의 이념을 위해 살아가려고 시늉하고 마치 그 이념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그의 이념은 실현되지도 않았고, 그의 행동은 다분히 돌발적이고 감정적이며 자기 분열적인 색채까지도 띤다.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실수나 미숙함 때문일 리가 없다 (의도적인 미숙함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첫 번째 장편소설이 아닌 네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특히 미성년적인 특성과 정반대 되는 강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악령'에 이은 바로 다음 작품이 '미성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더욱 원숙한 작가 정신을 발휘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젊은 영혼의 방황을 이보다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까발려서 보여줄 수가 있을까. 그러한 미성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필체보다 더 적확한 방법이 또 있을까.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그 독특한 필체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잘 활용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 난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그의 명성을 확인한다. 내 책상엔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놓여있다. 일부러 장편소설을 그가 쓴 순서대로 읽어왔다. 어떤 이들은 '미성년'이 마치 오류인 것처럼, 마치 옥에 티인 것처럼 평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직은 읽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그것이 증명되지 않을까 한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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