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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의꿈 Feb 05. 2024

마라톤이 끝날 때 네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혼자서 뛴 첫 10km 마라톤 도전 기록

나의 첫 마라톤은 2022년 '올림픽데이런'이었다. 당시 나는 바디프로필 촬영과 개인 피티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꾸준히 운동 중이었는데 그중 주 2-3회 정도 러닝을 가장 꾸준히 하고 있었다.


뛰는 중에는 어떠한 잡생각들이 정리되었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혼자만의 사색을 즐길 수 있었다.


가을이 되자 각종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그중 집 근처인 올림픽 공원에서 개최되고, 자주 갔던 동네인 잠실 근처를 뛴다는 소식에 덜컥 올림픽 데이런 마라톤을 신청하게 되어버렸다.


나의 러닝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그래도 마라톤인데 뛸 거면 10km 해야지!!!!"

나는 이때 내가 겁대거리도 없이(?) 정말 무모하게 첫 10km 코스에 도전했다. 평소 연습 때 7-8km를 뛰어본 적도 없었는데, 그래도 나름 '첫 도전'이니까 기준점을 높게 잡는 게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 마라톤 나가."


중요한 일이 생기면 항상 X에게 문자를 보냈다. 강남역에서 침수 사건이 터진 어느 여름날, 강남대로에 갇혀서 강남역 6번 출구까지 걸어오다가 정말 맨홀에 빠져 죽을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X를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자를 보냈다. 5년 동안 중요한 일들을 같이 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공유하는 게 나에겐 당연했다.


[X] "열심히 잘 마무리하고 오렴."


역시나 그의 반응은 무미건조했지만, 그도 내가 중요한 일을 공유해 주면 응원해주곤 했다. 이게 미련인지 정인지 모르겠지만, 난 당시에도 완전히 그를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첫 마라톤은 생각보다 긴장되었다. 이유는 10km를 혼자서 완주한 적이 없었고, 혼자 뛰더라도 5-6km만 겨우 뛰었기 때문이다. 항상 혼자 뛰었기 때문에 '다 같이 뛰었을 때 혼자 뒤처지면 어쩌지? 갑자기 물이 먹고 싶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탈주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들어 긴장되었다.


"아빠 나랑 같이 가주면 안 될까?ㅠㅠ"


심지어 나는 혼자 가야 한다는 압박감과 두려움에 아빠한테 같이 가달라고 말했는데, 아빠는 그날 동창회가 있어서 안된다고 거절하셨다ㅠㅠ 결국 나는 혼자서 마라톤을 준비해야만 했다.


가기 전에 주변에서 딱 1명 마라톤을 뛰는 친구가 있어서 오랜만에 조언을 구할 겸 문자를 보냈다.


[나] "내일 나 마라톤에 나가는데, 좀 긴장되네 ㅠㅠ 팁 같은 거 줄 수 있어?"

[친구] "일단 아침에는 뭐 많이 먹고 가지 말고ㅎㅎ 처음에 천천히 뛰어야 해. 시작할 때 네가 원래 뛰던 것보다 천천히 뛰어야지 더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계속 뛸 수 있어. 처음에 빨리 뛰면 나중에 지쳐"


천천히 뛰라는 조언. 몰랐다면 난 주변 인파들을 신경 쓰면서
뒤쳐질까 봐 엄청나게 빨리 뛰었을 것 같다.


[친구] "옷은 최대한 가볍게 입고. 전 날은 뛰지 말고 제발 푹 쉬어라. 생각보다 힘들고 다리 많이 아플 거야"

[나] "나 처음이라 너무 긴장되는데, 혼자 가는 거라서 더 긴장되네!"

[친구] "나도 항상 마라톤은 혼자 가는 걸. 달리기는 혼자야. 할 수 있어 파이팅"



그래, 유부남인 내 친구도 와이프 없이 혼자 항상 참가한다고 하는데, 나는 솔로라서 혼자 나가는 게 아니다. 나는 내가 혼자 달리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친구에게 얻은 조언을 기억하면서 오전 8시에 집에서 나섰다. "혼자 잘 뛰고 와라~" 아빠와 엄마의 응원과 함께.





사람들은 모두 러닝크루와 함께 행복해 보였다


오전 8시 30분쯤 올림픽공원에 도착하자, 수많은 러닝 크루들이 다 같이 으쌰으쌰 하고 있었고, 모두 활기찬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생각보다 러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놀라웠고 다들 이 아침부터 참 부지런하다고 느꼈다. 혼자온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였으나 잘 보이지는 않았다.


난 혼자지만 외롭지 않다.


군중 속에서 혼자 있으니 나도 모르게 비장해졌다. 처음 가는 길을 혼자 하는 것만큼 두렵고도, 설레면서 긴장되는 일은 없다. 수능 날 아침 혼자 시험장으로 갔을 때, 토익 시험을 보러 혼자 떠났을 때, 혼자 미국 서부를 여행하기로 결정하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처럼.


내면의 에너지를 모으고 꼭 이루고 싶은 목표를 위해서 스스로의 신체와 감정을 잘 컨트롤하는 이 감정.
이별을 겪고 참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혼자 스트레칭을 하고 음악을 듣다가 오전 9시가 되자 무대에서 다 같이 준비운동을 하는 타임이 시작됐다. 10월의 아침은 아직 조금 쌀쌀했기 때문에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갔던 나는 약간의 추위에 바람막이를 그대로 입고 뛰기로 했다.


5,4,3,2,1!!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총성과 함께 출발이 시작됐고, 시작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앞질러갔다. 나이키런 앱을 켜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평소 빠르게 뛰던 페이스가 1km당 5초 대였다면 일부러 5초대 후반-6초대로 뛰었다.


처음부터 너무 빨리 뛰지 말고
천천히 뛸 것!


난 무사히 완주하고 싶었다. 1시간 내에 들어오고 싶었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탈진하거나 다치고 싶지도 않았다. 난 이 거리를 올곧이 완주하고 싶다는 목표가 컸다.


난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배동만이'. 당시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어서 이 분의 사진을 몇 장 빌려본다.


3km 지점까지는 올림픽 공원 주변으로 이런 산책길을 통제한 평지로 러닝 하기 정말 좋은 코스였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었고, 3-5km까지는 조금 뛰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호흡 조절이 익숙해져서 속도를 올려보기도 했다. 이 때는 평소 혼자 뛸 때처럼 기분이 상쾌했고, 오히려 조금 천천히 뛰어서 풍경을 즐기기도 좋았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배동만이'


5km 구간에는 한성백제박물관과 조각공원이 나와서 푸르른 나무들이 울창했다. 항상 혼자 뛰던 5km 구간에서 멈추게 될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계속 옆에서 같이 뛰어주고 있어서 나도 계속 뛸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다 같이 뛰니까 뭔가 조금 더 파이팅 넘치고, 쉽게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혼자였지만 같은 목적을 가지고 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혼자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6-7km 지점부터 시작되었다.


올림픽런은 6km 지점까지는 평화의 광장 주변을 돌아가 그 이후에는 성내천 산책길을 따라가다가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그래서 6km까지는 고도가 거의 없었던 평지였다가 그 이후부터는 경사로가 반복되고, 뛰는 길이 상대적으로 좁게 느껴지고 커브길도 많아졌다.   


"파이팅! 힘내세요! 6km 지점이에요!"


중간중간 행사 진행 요원들이 응원을 해주었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긴장은 조금은 풀렸던 것 같다. 그러나 6km 정도까지 쉬지 않고 뛰었을 때 다리에서 감각이 없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땀이 없는 편이었는데, 땀이 비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입고 시작했던 바람막이는 이미 허리에 둘러진 지 오래였다.


헉헉헉


겨우 7km 지점에 왔을 때 45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앞에 보였던 멋진 풍경들을 즐기지 못하는 순간이 왔고,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의 등번호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완주할 수 있을까? 1시간 내에 들어갈 수 있을까?


속도를 더 내면 1시간 안에 결승선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으나, 호흡이 너무 가파르게 차오르고 다리게 점점 힘이 풀려갔다.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졌고, 목표한 시간보다 오버되더라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기로 했다.


8km 부근의 산책길에서



마지막 2km를 남기고는 정말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냥 뛰고 있는 이 행위 자체를 유지시키기 분주했고, 어떻게든 시간 내에 결승지점에 들어가야 한다는 '느낌'뿐이었다.


다리에 감각이 점점 더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건 내 의지로 뛰고 있는 건지 다리가 알아서 자동으로 뛰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자주 멈추고 싶었고, 달리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나는 걸으러 온 게 아니고 뛰러 온 것이다!


그렇게 겨우 걷기와 뛰기를 반복하면서 땀에 범벅되어 흐르는 게 땀인지 뭔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커플을 보면서 쟤들은 어떻게 같이 뛰지... 생각하다가, 나와 비슷한 나이대와 체형의 여자를 보면서 저 사람도 나랑 속도가 비슷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9km 부근에서 나타난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진정한 죽음의 길을 맛봤다..


9km 부근에서 나온 오르막길에서는 정말 포기하고 싶고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오르막길에서 나는 내 다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감정을 처음 느껴봤고, 신체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갑자기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이걸 직업으로 하신다고? 그렇다면 그들은 국가영웅이 될 자격이 정말로 충분하구나!!! ㅠㅠ


 마지막 1km를 남긴 지점부터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이 비워지고 몸이 힘들고 다리가 아파서 정말 이 행위를 중단하고 싶다는 욕구뿐이었다.


그래서 달리는 동안에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내가 평소 안일한 생각을 하며 쉬는 생각을 하는 건 내가 몸이 안 힘들어서 그런 거구나...


몸이 힘들면 몸을 단련하는 것에만 집중이 되지 다른 생각이 안 든다.


정신적 고통이 힘들다면 신체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면 되는 건가?!


몸의 긴장은 오히려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처음에는 도착 지점에 네가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정신없이 뛰다 보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너의 전화, 너의 문자, 너와의 추억들... 그 아무것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로지 그 순간 결승지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멈추거나 다치거나 탈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10km를 완주하게 되었고, 직원분이 작은 메달 하나와 간식거리를 챙겨주시자 비로소 끝난 게 실감이 났다.


"드디어 끝났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렸다. 숨을 헐떡거리고 지치고 다리는 정말 피가 몰려 내 다리인지 남의 다리를 이식한 건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후련했다. 이 고통이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로 쾌감이 몰려왔다.


결승선에 들어오고서는 아무것도 못하다가, 20분 정도가 지나자 사진도 찍고 주변을 구경하는 여유가 생겼다. 간식으로 받은 물과 바나나를 처음 먹었는데, 맛있다기보다는 몸에 뭔가를 집어넣어(?)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목적이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인터넷에 칩으로 인식된 나의 최종 기록을 찾아보았다...!




아쉽게도 목표했던 1시간보다 4분 23초 지나서 결승지점에 들어왔다. 그래도 완주를 했다는 사실에 기뻤고, 내가 중간에 부상을 당하거나 탈진해서 중도하차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뿌듯했다.


천천히 오래 달릴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천천히 달려서 체력을 안배할 수 있었고, 마지막 2km 코스에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나이키 런의 기록을 확인하니,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꾸준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렸다면 아마 너무 지쳐서 마지막 2km를 걷거나 거의 뛰지 못할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너에 대한 내 마음도 그랬을까? 난 너와 만나는 동안 너무 빨리 달려서, 그래서 마지막에 뛰지 못하고 걷거나 아예 누워있었던 것 같다.



연애도 처음부터 천천히 달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마라톤의 끝에서 널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 마음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서 마음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몸뿐'이라는 한혜진의 명언이 생각났다.


그렇게 나의 첫 10km 마라톤이 끝났고, 나는 그렇게 천천히 오래 달리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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