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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길 Aug 17. 2021

글을 쓰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글을 쓰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또한, 몇 달 간 독서를 할 수 없었으며 영화, 드라마 등 미디어 창작물들을 볼 수 없었다. 최근 약을 복용하며 양귀자의 ‘모순’을 읽었으나 여전히 영화, 드라마를 내 의지로 보는 것은 어렵다. 이는 단순, 내 우울증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영화, 드라마에 기저되어 있는 사회 갈등들을 인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내 의견이 옳다고 피력할 에너지가 탈구된 것이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당해왔던 불평등과 폭력에 대한 저항을 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들만의 망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거대한 무지와 폭력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몰라 무력감과 허탈함이 느껴져 나의 글쓰기는 사라졌다.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싶다. 아무런 생각 없이 깔깔 웃으며 볼 수 있는 액션 영화나 B급 영화를 제외하고 사회 갈등과 불평등을 다루는 영화를 보고 싶다. 또한 이러한 영화를 보며 나의 생각을 토로하고 사람들과 논하고 싶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적 폭력과 더불어 현재 나의 처지가 나를 가로막는다. 대학교 4학년 막학기를 앞둔 취준생. 수많은 진로를 갈등하며 경험하면서 갖은 성희롱을 당하고 나의 무능력함과 무의지를 인지하였다. 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며 젠더 문제와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였으나 이는 나의 착각이었다. 말들을 듣고 기분이 이상하였으나 내 자신이 예민하다고 치부하였고 이 기분이 정도를 넘어서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내가 들었던 말들이 성희롱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간, 책, 영화, 드라마, 강의 등으로 공부한 페미니스트 이론들이 모두 원망스러웠다. 내 자신이 직접 당하고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데, 이것을 직접 겪고도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였는데 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영화, 드라마에 점철되어 있는 여성 혐오, 비하 표현들과 행동들을 내가 글로 쓸 자격이 있는지, 이것이 과연 효력이 있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성희롱을 겪고도 아무런 대처를 못하고 또 이를 겪을 위험을 가지고 있는 20대 여성으로서 기업에서,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암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암담함과 사회에 대한 분노가 존재해도 나는 이러한 사회에 순응해야 한다. 취준생으로서 진로를 결정하고 공모전에 나가며 수많은 자소서와 면접을 겪어야 한다. 현재 나는 영화, 드라마에서 잘난 인물들과 못난 인물들이 알아서 위기를 헤쳐 나가는 것을 보며 무력한 내 자신과 비교하고 더이상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내 자신이 원래 나약한 것인지, 사회의 폭력에 내가 박멸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이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20대는 빛나는 청춘이며 아파야지 청춘이라고 한다. 그럴 바에 나는 청춘을 내버릴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이렇게 내 신세를 한탄하는 말을 해도 나는 오늘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내일도 오늘과 같이 무력한 하루를 지내도 순간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함이 있을 것이며 나는 이를 만끽할 것이다. 사회가 설정한 거시적인 성취는 거부한다. 나는 자력으로 나만의 즐거움과 행복함을 인지하며 인생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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