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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길 Jul 26. 2020

성폭력의 예술적 영감화

영화 시

  영화 《시》는 여성의 사회적 약자로서의 삶을 통속화하고 이를 예술에 대한 영감으로 도구화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여성 인물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여성들은 가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 받으며 남성들의 비윤리적인 폭력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박탈하게 되는 상황에 전락한다. 이에 반해 남성들은 극심한 폭력의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 처벌받는 것이 명시되지 않는다. 또한, 남성들은 자식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보호자, 폭력을 처벌하는 형사, 폭력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시를 가르치는 강사의 역할을 가진다. 이렇듯,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 약자이다. 


  물론 이는 현실이다. 그러나 영화가 이를 여성 본연의 속성으로 치부한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영화가 여성이 본질적으로 약자가 아니고 사회의 가부장제 구조에 기인하여 강제적으로 약자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극심한 폭력을 예술의 영감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배제한다. 성폭력 가해자의 보호자가 자살한 피해자에 관한 시를 쓴 것은 피해자와 그의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피해자를 대신하여 자신과 가해자를 자의적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이 시는 공감이 불가하며 읽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성폭력과 여성의 죽음을 예술을 위한 영감으로 포장하려는 감독의 편협한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영화 《시》는 여성의 사회적 약자화를 통속화하고 이를 여성의 본질적인 속성에 기인한 것으로 치부한다. 영화에서 미자는 순진하고 외모를 치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신의 딸이 두고 간 아들을 파출부 일을 하며 돌보는 인물이다. 미자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제적으로 부과한 의무들을 모두 수행하는 여성인 인물로 설정된 것이다. 한편, 영화의 결말에 미자의 죽음이 암시된다. 성폭력 피해자인 박희진과 그의 어머니는 남성들이 가한 폭력에 수동적으로 대처하고 박희진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자살하는 비극적 인물로 묘사된다. 박희진은 영화 극초반부터 자살한 것으로 나타나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거나 남성의 폭력을 증명할 발언권을 박탈당한다. 또한, 그의 어머니와 미자는 가해자와 가해자들의 아버지들에게 어떠한 주장도 하지 못하고 이들의 말에 수긍할 뿐이다. 이처럼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은 모두 남성과 가부장제의 폭력에 의해 인간성을 박탈당하고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현상이 여성의 “본질적인” 약자로서의 속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내에서 여성과 남성의 위계질서가 자연적인 것으로 인지되어 여성은 약자로 전락하고 남성의 폭력을 당하는 것이 정상적인 현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또래 남학생들이 박희진에게 가한 집단 성폭행의 기형성과 극도의 비윤리적인 폭력성을 문제시하지 않고 이를 시의 소재로 삼는다. 영화 속에서 박희진은 “저항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안타까운 희생양”으로 설정되어 시를 위한 영감으로 기능한다. 이를 위해 필연적으로 박희진의 결말은 죽음이어야 한다. 또한, 알츠하이머에 걸려 더 이상 손자를 돌볼 수 없게 된 미자 역시 사회가 부여한 “모성”적인 역할을 다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박희진과 미자의 존재 불능을 남성과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여성이라는 성별에 기인하여 여성에 대한 남성의 비윤리적인 폭력을 정상화하고 이를 필연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이는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는 것이 필연적이고 여성은 이를 저항할 수 없으며 사회 내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영화는 남성과 사회의 폭력성을 묵인하고 이들의 책임을 면제한다. 물론, 결말에 미자의 손자가 형사에 의해 체포되나,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여성이 아닌 또다른 남성에 의해 처벌받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따라서, 영화는 여성의 사회적 약자화를 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이를 통해 남성과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묵인하였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더 나아가, 가해자의 보호자가 피해자의 심정에 동일시되어 그에 관한 시를 쓴다는 것은 피해자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기만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단편화하는 행위이다. 집단 성폭행 당한 피해자의 아픔은 가해자의 보호자가 단순히 그의 어머니와 성폭행 당한 장소를 찾아가고 돈을 위해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갖고 나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가해자의 보호자가 이에 대해 시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쉽게 해석할 수 있고 접근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해자의 아픔이 그 누구도 공감하지 못하는 개인만의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은 가해자의 보호자가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하고 단편적이지 않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가장을 하나, 내재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을 배제하고 철저히 가해자 입장에서 서술한다. 미자의 시는 가해자인 남성과 가부장제의 폭력을 예술의 영감으로 전환하는 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본질적인 가해자인 남성과 가부장제는 미자의 시 덕분에 은폐된다. 영화는 피해자의 아픔을 시를 위한 소재의 수준으로 축소하고 가해자의 보호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편화하였다는 점에서 피해자를 기만한다.


  한편, 여성은 남성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남성의 폭력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과 가부장제의 폭력은 그들의 폭력성에 기인하고 영화에서 서술된 여성의 “수동성과 무력함”에 기반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여성은 남성의 폭력을 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으며 가부장제 사회 내에서 생존할 수 있다. 또한, 남성과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혁파하여 여성이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조성할 수 있다. 여성은 충분히 강인하고 주체적인 존재로서 남성과 가부장제의 영향 하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삶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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