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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른백수 MIT간다 Jul 23. 2024

퇴사하고 싶지만 일은 하고 싶어

백수일기 #2

월요병, 퇴사병, 상사병 뭐 하나 거르지 않고 골고루 앓으며 내 적성은 백수라고 철석같이 믿고 6년 간의 직장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난생처음 고대하던 백수가 되어보니 마냥 적성은 아닌 듯하다.



백수 일주일 차,

대학원이 붙을지, 미국에 가게 될지, 새로운 곳에 취직이 될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데도 마냥 좋았다. 머리 아픈 전략회의도, 가슴 떨리는 클라이언트 전화에서도 해방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웃고 다녔다. 오랜만에 놀러 간 첫 회사 선배들은 얼굴이 좋아 보이다 못해 피부에서 빛이 난다고 했다^^



백수 한 달 차,

마지막 근무일 이후 일주일쯤 지나서 머리를 식힐 겸 영국으로 떠났다. 미국에 석사 지원을 해놓고 사표는 질렀는데 결과가 나오려면 한 달쯤 남아 마음이 불안해질 쯤이었다. 연차 소진으로 월급도 나오겠다, 퇴직금도 곧 들어오겠다. 거기다가 석사에 보란 듯이 합격해 버렸다! 돈을 물 쓰듯 썼다. 역시 돈을 버는 것보다는 잘 쓰는 쪽이 체질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온갖 사람들을 만나서 퇴사한 이야기, 석사에 합격한 이야기, 영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놓으며 바쁘게 지냈다.



백수 두 달 차,

슬슬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주중에는 어차피 다들 일을 하니 약속도 별로 없다. 사실 이제 만날 만 한 주변인들에게 모든 근황을 다 털어놔서 딱히 더 할 이야기도 없다.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운동을 주 3회 이상 가본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침도 차려먹기 시작했다. 눈뜨면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래도 그런대로 이런 평화가 좋다.



백수 세 달 차,

왠지 모르게 기분이 다운되고 별로 놀러 가고 싶지도,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다. 돈 쓰는 것도 재미가 없다. 한동안 이 우울감의 원인이 뭘까 혼자 고민했다. 사실 이때쯤에 나는 '백수'라는 신분이 주는 불확실성도 없었다. 넥스트 스텝이 정해진 6개월 '기간제'백수기 때문에. 그럼에도 고작 절반인 세 달이 지날 쯤 나는 백수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같이 놀 친구가 없어 그런가, 하고 싶은걸 다 했더니 소재가 고갈돼서 그런가... 그러다 친한 친구가 놀러 나오라는 카톡에 그러고 싶지가 않다고 우울증인지 병원이라도 가볼까 생각 중이라고 무심결에 말했더니 일 초도 되지 않아서 진단이 나왔다.


'너, 일을 안 해서 그래. 너 같은 캐릭터는 딱 성취감으로 사는 유형인데 생산성이 없잖아.'


머리가 딩- 했다. 맞다. 나는 꽂혀있는 목표가 있을 때 추진력이 생기는 사람이다. 목표가 없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방황을 하고 있었다. 나는 축 늘어져 있다가도 뭔가 하나 꽂히면 무섭게 파고드는 타입이다. 근데 지금 석 달째 꽂힌 게 없는 거다.


나, 어쩌면 워커홀릭 일지도?


백수 네 달 차,

어쩌면 나는 워커홀릭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은 건 아니었다. 생산성이 없이 보내는 시간들이 너무 길어질수록 시동이 꺼진 것 같았다. 시동을 켜줄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싶었다. 학생 신분을 찾을 9월이 되기 전까지 나를 움직이게 할 목표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첫 째, 책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새벽 5시쯤인가 이상하리만큼 일찍 눈이 떠졌는데 갑자기 글을 쓰고 싶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브런치. 왕년에 독후감상을 휩쓸며 글빨 좀 날렸었다. 무슨 글을 쓰지? 석사에 합격해서 미국에 갈 거라고 하니 생각보다 주변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몇 달 지났다고 대답해 주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잊기 전에 해외석사를 준비한 과정을 글로 옮겨보기로 했다. 거기다가 브런치가 '작가님'이라고 그럴듯한 직함까지 붙여주니 신나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둘째, 전자책을 팔아볼까?

막상 해외석사 준비 과정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이거 전자책으로 만들어 팔아볼까? 싶다. 전자책을 팔려고 보니 책표지도 디자인해야 하고 판매할 웹사이트도 만들어야 하고 광고도 돌려야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재밌다!! 직전 회사에서 신사업을 하면서 잡무를 챙겨야 할 때마다 툴툴거렸는데 그때 익힌 잡다한 스킬들이 적재적소에 쏙쏙 쓰이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셋째, 프로 당근러가 되었다.

10년 치 한국 자취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옷을 버리고 팔고 가구, 가전들을 몽땅 팔았다. 팔다 보니 당근마켓이라는 게 은근 잘 팔릴 것 같은 스피커는 안 팔리고 '이런 게 팔려?' 싶은 빨래통은 5분 만에 팔리는 재밌는 곳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중요한 건 재밌다!! 그렇게 당근 매너온도 47.6도를 달성하며 프로당근러가 되었다. 살림살이를 다 팔고 계산해 보니 그렇게 10년 치 서울살림살이가 450만 원으로 정리되어 돌아왔다. 시원섭섭하다.



백수 다섯 달 차,

목표를 가지니 또 신나게 살아가는 나를 보며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한 게 감사하다.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가장 행복하다 했던가, 사실은 맨날 일하다 가끔 노는 게 행복한 것 아니었을까. 나는 평생 일할 팔자이려나...

내 원동력에는 '성취감'이 필요하다. ‘아, 잘 살고 있다. 의미 있다. 가치 있다.’하고 확신할 수 있는 감정이랄까? 다만 아직은 일하는 것 말고 어떻게 성취감을 느끼는지 잘 모른다. 가령 봉사를 하고 기부를 하고 남들에게 베풀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다. 물론 나는 자원부족으로 현재는 어렵다^^ 여행을 하고 공부를 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는 여태 내가 여기에 해당되는 줄 알았다.


내 나이 서른에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다. 어쨌든! 평생 일하기는 싫으니 내가 성취감을 느끼는 것들을 부지런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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