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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Apr 16. 2022

01. 꽃

프로젝트 [런던이라서, 그러나]




다시 돌아온 런던, 새 공간에 짐을 풀고 적응해간지 두 달이 조금 넘었다. 겨우 두 달. 그리고 나는 다시 '꽃을 사는 일'을 일상에 끼워 넣었다. 내 방에 둘 꽃을 사는 일말이다.

집을 나와 왼쪽으로 몸을 돌려 걸으면 몇 걸음 가지 않아 테스코(Tesco)라는 마트 - 조금 큰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같은 느낌- 가 있다. 그곳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건 식료품이 아니라 바로 꽃이다. 하얀색, 노란색, 분홍색, 빨간색, 보라색. 튤립과 장미. 수선화. 색과 종류가 어찌나 다양한지 마트에 들어설 때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꽃구경을 하기 바쁘다. 꽃은 내게 언제나 그런 식이다. 제 몫의 아름다움으로 늘 시선을 사로잡는 존재들. 어쩜 그렇게 예쁠까? 다 다르게 생겼는데, 모두 다 아름답다.



지난 두 달 간은 그 꽃을 냉큼 손에 들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고 곧장 살 것들을 사러 발걸음을 돌렸다. 방에 둘 딱 맞는 화병을 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사고 싶던 화병의 가격은 가난한 유학생의 지갑이 시원하게 열리기엔 좀 애매했다. 제일 저렴한 게 집 앞 테스코에서 파는 6파운드(약 9천 원) 짜리 큰 유리 화병이었는데, 크기가 맞지 않을 것 같아 고민만 여러 번 했다. 더 싼 걸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이케아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더 적절한 게 있었지만 장바구니에 넣어놓기만 했다. 배송비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 같아서. 그러다 얼마 전, 북페어(Book Fair) 때문에 갔던 동네에 이케아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나는 직감했다. 그날이 바로 화병 사는 날이라는 걸. 그리고 드디어 큰 화병 1개, 작은 화병 2개를 총 6파운드에 사서 집으로 데려왔다.

"아싸, 6파운드에 3개나 샀다~"

그리고 다음날, 가뿐한 발걸음으로 집 앞 테스코에 들어가 3파운드짜리 (약 5천 원) 튤립 한 다발을 바로 품에 안았다. 집으로 돌아와 예쁜 분홍이 들을 다듬고, 화병에 꽂고 나니 비로소 내 방이 내 방 다워진느낌이다. '내일 되면 더 어여쁘게 피어나겠지?' 하는 설레는 마음도 함께.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꽃을 좋아하는지 모를 때부터 꽃을 좋아했다. 언제부터 꽃을 좋아한 거지? 꽃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니 2014년, 서울이 떠오른다. 그해 여름, 나는 뒤늦게 사춘기를 앓았다. '나는 누구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지?' 이런 질문들이 내 안을 뒤섞어 놓았고, 나는 삶의 모든 것을 멈추어 버렸다. 그리고 여행을 했다. 서울도 참 많이 돌아다녔다. 어떤 날엔 빈 노트에 펜을 들고 막연히 해보고 싶던 것들을 적어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꽃시장에 가서 꽃 사기'. 그래서 처음으로 남대문 시장에 가서 5천 원어치 보라색 리시안셔스 한 다발을 샀다. 맑고 환했던 그날 오후. 신문지에 둘둘 싼 꽃을 품에 안고 갔던 안국역 근처 어떤 카페. 바닐라 라테를 홀짝거리다 집으로 돌아와, 꽃 사진을 찰-칵. 그때 마음속에서도 사진이 찍혔는지 지금도 그날이 선명하다. 처음으로 내 방에 꽃을 둔 날이었다. 리시안셔스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때의 난, 나를 위해 꽃을 사는 게 뭔가 좀 사치 같았다. 그 어여쁜 존재를 내 옆에 둘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이었다.


꽃을 잊고 살다, 그러다 아주 싼 가격의 꽃을 마주치면 다시 사다가, 또 잊어버리길 반복하다 나는 런던에 갔다. 그리고 런던은 나에게 꽃을 옆에 두라고 아주 부드럽게 일러주었다. 2018년, 그해 생일. 주인아주머니는 내 생일을 축하해주시며 선물로 큰 꽃다발을 주셨다. 그녀가 선물해준 백합 몇 송이를 화병에 꽂았는데, 그다음 날 살며시 꽃잎을 연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때, 꽃을 바라보며 잊고 살던 느낌이 다시금 내 안에서 몽글몽글 피어났다.


‘아, 나 꽃 좋아하지…?’

 


'그래, 급여받는 날엔 꽃을 사야겠어!'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고, 동네를 걷다 보니 꽃이 전부터 그랬다는 듯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동네, 윔블던엔 지하철 출구 앞에 작은 꽃집이 있고, 하다못해 크고 작은 마트에도 꽃이 있다. 종류는 또 어쩜 그렇게 다양한지. 없는 게 없던 주인아주머니는 내게 화병 몇 개를 주셨고, 나는 2주에 한번, 혹은 한 달에 한번, 마음 가는 대로 꽃을 샀다. 어떤 날은 미스티. 또 어떤 날은 장미. 여름의 봉오리가 맺을 무렵엔 하얀 수국, 크리스마스 시즌엔 빨간 튤립을. 그렇게 사온 꽃을 침대 옆, 책상 위에 두고 나면 마음이 늘 몽글거렸다.   



생각해보면 꽃이 주는 행복은 일시적이지 않다. 꽃집 앞에 가던 발을 멈추고 무슨 꽃이 있나 둘러볼 때, 그날의 기분이나 날씨, 계절에 따라 알맞은 꽃을 고를 때, 꽃집 언니로부터 신문지나 종이에 둘둘 말아 건네받을 때, 그리고 그걸 가방에 툭 낀 채로 집에 걸어갈 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종이를 펴서 꽃을 다듬고, 화병에 담을 때. 그리고 마침내 내 공간에 한 구성원이 되었을 때. 웅크리고 있던 어여쁜 아이들이 다음날 혹은 다다음날 수줍게 더 피어났을 때. 그리고 하나 더. 이건 내게 좀 더 큰 행복인데, 바로 누군가를 위한 꽃을 골라 그에게 건넬 때.


꽃 선물을 좋아하게 된 건 귀국을 한 2020년부터였다. 런던과 잠시 굿바이를 남기고 다시 돌아온 한국. 한국에 있던 1년 반은 내 내면을 싹 갈아엎는 시간이었다. 마치 씨앗을 뿌리기 전에 땅을 싹 갈아엎는 것처럼. 불필요한 것들을 바라보고 치우는 건 썩 기분 좋은 일, 아니 아픈 일이었지만 그 시절, 너무 아프지 말라고 내게 선물처럼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 천사는 나를 만날 때 종종 꽃을 주었다. 그리고 꽃을 받을 때마다 고맙고 행복했다. 그의 집을 놀러 가면 언제나 싱그러운 초록과 갖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 자신에 지쳐버린 한 여자를 환영해주었다. 어떤 날은 작은 화병에 붓꽃이 있었는데, 그 보라색 꽃잎에서 나던 향기가 어찌나 향기롭던지.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코가 기분 좋게 간지럽다.


“아름, 꼭 향수 같지 않아요?”

“너무 좋다… 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내게는 그곳이 바로 작은 천국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머물다 보면 버겁고 지쳤던 마음이 좀 누그러들었다. 그래, 너무 애쓰지 말고, 조금씩 행복해지자.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 천사 덕분에 그때부터 나도 본격적으로(?) 종종 누군가를 위해 꽃을 샀다. 이유는 다양했다. 누군가의 좋은 날을 축하하기 위해, 그냥 우리가 오랜만에 만나서, 어떤 누군가에게는 삶이 버거워도 마음은 지치지 말라고, 혹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누군가를 위해 꽃을 고를 때면 나는 그 사람을 상상한다. 오늘은 이 사람과 어떤 게 어울릴까? 하며 꽃집을 둘러보면 어여쁜 아이가 내 눈에 딱, 하고 들어온다. 몇 송이라도 괜찮다. 한 송이도 괜찮다. 고이 포장한 꽃을 들고 그 사람에게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꽃을 건네는 순간, 그가 살짝 놀라거나 혹은 맑고 옅은 미소를 지으면 나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가만 보면 꽃 선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를 생각하고 고르게 되는 선물인데, 언제나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조금 더 확실한 마음으로, 그러니까 내 일상에 꽃 몇 송이는 꼭 끼워 넣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런던. 조금씩 자리 잡고 있는 내 방을 둘러보니 분홍색 튤립이 보인다. 한 주 전엔 웅크려있더니 이제는 곧 고개를 떨굴 것 같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또 이 꽃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마침 오른편에 있는 창문으로 햇살도 기분 좋게 스며든다. 어쩐지 밝고 아름다운 것이 내 마음에 스미는 것 같다.


나도 내 삶을 돌보고 가꿔야겠다는 마음. 이제야 좀 내 삶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아. 그리고 이 행복을 누군가에게 건네며 살자는 마음.


이 글을 마치면 꽃집에 들러 튤립 말고 다른 꽃송이들을 골라와야겠다. 그리고 같이 살고 있는 플랫 메이트들을 위해 부엌에 꽃을 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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