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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범 Apr 17. 2020

아빠입니다.

현실도피 위한 운동에서 행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무기력하다. 다리 골절 부상을 당한지 보름이 지났다. 아직도 20일은 더 깁스와 목발에 의지해 생활해야 한다. 


SNS를 검색하며 멋들어진 몸짱 직장인들의 ‘Before & After’ 사진을 보고 있다. 

“나도 지금쯤은...”


예전처럼 운동과 식이요법에 올인하지 않고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몸짱 다이어트가 가능할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즐겁게 살을 뺄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 모든 게 몸 개그 한 번으로 ‘일시 중지’가 돼버렸으니 끝없는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요즘이다. 


언제부터 내 삶에 운동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아들이 장애인인 걸 알아갈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현실 도피를 위한 수단이 운동이었을지 모른다. 무언가 집중하고 몰입할 게 필요했다.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피하기 위한 무언가. 그게 필요했다.


아들은 발달이 느렸다. 쌍둥이 딸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차이가 컸다. 돌이 지나자 곧바로 치료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들에게 장애가 있단 생각보단 발달이 늦는 부분을 보충해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무의식은 아들의 장애를 감지하고 있었다. 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한 게 그 무렵부터니까.



좁은 어깨에 ET처럼 배가 나오고 걸그룹처럼 얇은 다리를 가진 ‘괴상한 몸’이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았다. “얼굴 보고 결혼했다”는 아내의 눈 먼 시선을 철썩 같이 믿으며 스스로 자뻑에 취해 살던 시절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던 장모님과 처음 만난 날 “아니 이렇게 달덩이처럼 잘생겼냐”며 그 동안 결혼을 반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하신 것도 모두 얼굴 덕분이다.(지금은 세월 앞에 달덩이처럼 잘생겼던 얼굴도 빛을 잃었다) 


얼굴에 자신 있으니 몸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부터 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동네 헬스장에 등록한 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몸을 혹사시키고 싶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재우다 같이 잠들때 쯤 조용히 집을 나와 헬스장으로 향했다. 무거운 덤벨과 바벨을 들고 내 몸을 단련했다. 아니 괴롭혔다. 


운동 방법도 모르고, 운동 방식도 몰랐다. 그저 무거운 걸 들고 반복하는 순간 내 몸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 그것이 ‘운동이 되는 순간’이라 착각했다. 그렇게 몸을 괴롭히기만 하면 운동 효과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강행한 것은 내면의 불안감을 씻어내기 위한 일종의 발악이었다.

1년 이상을 그렇게 헬스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트레이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운동 너무 열심히 하시네요.”

“네, 뭐 하는 거죠. 그냥(웃음)”

“그런데 좀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네?(‘뭐지? 이게 바로 PT를 끊으라는 영업인가?)”

“뭔가 잊어야 할 게 있는 사람처럼 무조건 운동에 집중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젠 좀 즐기면서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는 자신도 뭔가 실패했던 과거를 잊으려 운동을 시작했다가 트레이너가 됐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사업에 실패해 모든 것을 잃은 뒤 운동으로 재기를 꿈꾸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방향은 틀렸지만 직감은 예리했다. 트레이너 초년병이었지만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그날 이후 (PT를 등록하지 않았는데도) 이 트레이너를 통해 많은 운동법을 배웠다. 가장 좋았던 것은 몸을 혹사시키며 무언가를 잊는 나쁜 방법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즐기면서 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일종의 멘탈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근육통이 있으면 그날은 그냥 하지 마세요. 오셔서 러닝머신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걸으세요. 걸으면서 TV도 보고 음악도 듣고. 그것도 싫으면 그냥 그날 하루는 동네 산책이라도 하세요. 마음이 힘든 데 몸까지 힘들 필요는 없잖아요. 좀 쉬는 것도 운동이에요. 진짜요.”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조언이다. 그렇게 마음을 잡아가며 내 안에 있던 어떤 불안감과 맞서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끝내 발달장애 판정을 받게 됐다.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들이 장애 판정을 받던 날은 술을 진탕 마셨다. 어제까지 나는 쌍둥이 아빠였는데 오늘부터 나는 발달장애 아이의 아빠다. 어쩌면 짐작하고 있었던 불안감을 확인하게 된 날, 슬퍼할 자유라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미쳤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눈을 뜨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오늘부터 난 발달장애 아이의 아빠다. 내 남은 인생은 아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른이 되어도 어른이 되지 못할 저 녀석을 위해 내 남은 인생을 다 바쳐야 한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할 시간이나 돈은 없었다. 모든 것은 아들을 위해. 아들을 위한 도구로서의 삶을 사는 게 내 사명이었다. 운동도 끊어버리고 친구들과의 모임도 줄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최악의 시간이었다. 아내는 당시를 ‘지옥의 3년’이라 부른다. 아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숭고한 삶을 선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은 가족 모두를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엉망이 될 대로 엉망이 된 시간이 흐른 뒤 깨달은 것은, 아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행복해야 하고 내가 먼저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제대로 배워보기 위해 나 자신에게 투자했다. 크로스핏, PT, 스피닝, 필라테스 등을 하며 몸을 만들었다. 하지만 없던 경제적 여유가 갑자기 있게 된 것은 아니어서 운동하는 동안에는 살이 빠졌다가 운동을 쉬는 동안에는 다시 살찌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쓰쓰쓰’를 생각했다.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며 개인레슨을 받지 않고도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며 살 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무리 없이 지켜질 수 있도록 생활화하고 싶었다. 습관처럼 들이고 싶었다. 


퇴근 후 지쳐 집으로 돌아와서도 다시 노트북을 켜고 ‘쓰쓰쓰’를 썼던 건 내 앞에 주어진 새로운 도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운동을 하고 물을 마시고 먹어도 배고플 다이어트 도시락도 주문했는데...


무기력하다. 하지만 이 무기력에 잠식되진 않아야 한다. ‘잠시 멈춤’일 뿐이라 생각해 본다. 2~3주 후에는 깁스를 풀고 다시 서서 타는 자전거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주말에는 등산도 하고 놀이터에서 줄넘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버티기로 한다. 


PS. 그렇다고 살 빼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식이요법이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취지로 새모이만큼 양이 적은 다이어트 도시락으로 하루 두 끼를 먹고 있다. 처음엔 고문처럼 느껴졌는데 익숙해지니 먹을만하다. 일주일만에 14팩을 다 먹고서 다른 브랜드 도시락으로 또 주문했다. 


웃긴 건 몸무게가 1kg 줄었다는 것이다. 역시 다이어트는 운동이 2, 식이요법이 8이었던가. 겁나게 운동했던 지난날에 자괴감이 들려고 한다. 하지만 이 방법(식이요법)으론 단기간에 살을 뺄 순 있어도 생활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다시 일반식을 먹기 시작하면 요요가 무섭게 온다. 그러니 움직일 수 없는 지금 비상처방 차원에서만 적용하는 것으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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