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의 결심
나는 운이 좋게도 대학 졸업을 치르기 전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간절히 원했던 일이라 입사 1년 차에는 출근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고, 2년 차에는 원하는 곳으로 이직도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직장에서도 막내였던 나는 시키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고(그땐 그게 미덕인 줄 알았다) 그렇게 많은 일을 떠안은 채 두 번의 해를 보내고 나니, 어느 순간 내 마음과 몸이 많이 상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는 퇴근을 하고도 뇌는 회사에 두고 온 듯 한 날이 많았다. 생전 걸려본 적 없는 인후두염 때문에 한 달에 세 번 꼴로 병원에 출석을 했고, 이러다간 그렇게 좋아하는 일이 질려버리게 될까 두려운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십 대 후반을 바라보던 나는 내 자신에게 어떤 선물을 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첫 번째로 내게 주고 싶었던 것은 "휴식"이라는 선물이었는데, 그럴려면 "퇴사"라는 선택이 먼저 필요했다. 처음엔 퇴사 사유로 무슨 핑계를 대면 좋을까... 하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로 "더 이상 출근하기 싫어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한번 마음을 먹고 나니 퇴사의 과정은 그리 어려울 거 같지 않았다. 그럼 휴식기 동안 뭘할 수 있을까? 아주 예전부터 긴긴 세계 여행을 원했는데, 그렇게 되면 3년 넘게 모아놓은 돈을 탈탈 털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머릿 속을 탁 하고 스친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워킹홀리데이였다.
처음 며칠은, 이미 워홀러로 살아가고 있는 상상에 빠져 설렘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선택은 허영이 아닐까. 한창 경력이 늘어야 할 때,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닐까. 애매하게 경력 단절이 되는 건 아닐까. 스물일곱에 너무 무모한 건 아닐까... 언제 설렜냐는 듯 여러 걱정과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한동안 내 마음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퇴사는 이미 뒷전이었고, 그냥 짧은 여행을 다녀올까? 그리곤 천천히 다른 직장을 알아볼까? 아니면 인생 뭐라고... 주사위라도 한번 던져볼까?
그러던 어느 겨울날의 퇴근길, 나는 종로3가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행을 보내고, 서동탄행 열차 문이 열려 몸을 실었다. 오후 10:45에 알람을 맞추고 익숙한 자세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꺾어 잠을 청했다. 어느덧 알람이 울려 졸린 눈에 승차역을 확인해보니 내릴 곳이 가까웠고, 열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니 이윽고 여러 대의 마을버스가 도착했고, 어떤 기사님은 급한 용변을 보러 어떤 기사님은 담배를 태우며 잠깐의 시간을 떼우는 듯했다. 조금 지나자 한대의 버스가 정거장 앞에 손님들을 실으러 왔고, "환승입니다" 하는 소리와 나는 버스에 올랐다.
세 정거장 거리의 도로를 달리며 하품을 쩌억 쩌억 하다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집에 다다르며 평소와 다를게 없는 하루의 끝무렵이었던 그 때 나는 결심을 굳혔다. 한국을 떠나기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