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정박한 배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미술관
덴마크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며 가고 싶은 유명 미술관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두었었다. 아르켄 현대 미술관(ARKEN Museum of Modern Art)은 그중에서도 제일 첫 번째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아르켄 방문 예정이었던 9월의 어느 아침 햇살은 집을 나서기 전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집에서부터 더욱 외곽도시로 나가는 건 처음이기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일찍이 집을 나섰다.
미술관은 코펜하겐에서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다. 내가 지내고 있는 Albertslund는 도시 외곽이기에 미술관까지 1시간 정도 소요되었지만, 코펜하겐에서 출발한다면 1시간 40분은 잡고 오는 것이 넉넉하겠다. 뚜벅이인 나는 Albertslund역에서 S-tog를 타고 Høje-Taastrup역에 내려 다시 한번 버스를 갈아타고 미술관에 도착했는데,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차를 가지고 온 것 같았다. 미술관은 코이에(Køge)만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 미술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바닷가 구경까지 실컷 할 수 있었다.
1988년, 25세 건축학도 소렌 로버트 룬드는 새로운 미술관 설계 공모전 참가하였고, 그가 공모전에서 우승을 하여 지어진 건축물이 지금의 아르켄 현대 미술관이다. 소렌은 자연의 모습이 건축과 함께 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해안가를 따라 견고하게 정착해 있는 배의 모습을 형상으로 디자인 하였다고 한다.
미술관 입장료는 115kr(한화 21,000원)로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술관의 아름다운 외관과 큰 전시 공간, 400점이 넘는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는 곳인 만큼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다양한 주제의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어 볼거리가 넘쳐났으며 나는 무려 세 시간 동안 전시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기억에 남았던 작품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바로 위의 이미지는 르네 스타에르(Lene Stæhr)의 사진 작품으로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대기에서 세 명의 벌거벗은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8년 허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척추 클리닉에서 촬영되었고 실제로 촬영에 임한 세 명의 모델 또한 척추 관련 질병이 있는 환자들이었다. 사람을 거꾸로 들어 올리는 기계를 이용하면 중력의 영향으로 몸의 무게가 척추를 누르지 않기 때문에 허리의 통증을 잠시나마 줄여준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세 명의 모델을 반중력 기계로 거꾸로 들어 올린 그 찰나에 촬영한 작품이다. 세 장의 사진은 이후에 디지털화 되었고 포토샵을 이용하여 배경은 단색으로, 모델의 피부는 분홍색으로 효과를 주어 미묘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그런 다음 사진을 180도 회전하여 피사체가 마치 떠 있는 듯한 착시를 주게 되었다. <Gravity I-III>은 평범한 몸을 반중력 기계를 통해 유머러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육체의 무게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자유분방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업으로 관람하면 좋을 듯하다.
12개의 동물 머리가 금빛으로 조각된 위의 작품은 중국 작가 아이 웨이웨이의 12지상 <Zodiac Heads>(2010)이다. 아이웨이웨이는 세계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현대미술 작가이지만 자국인 중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반체제 인사로 불리고 있는 사연이 많은 작가이다. 위의 12지상은 중국 최고 정원인 '원명원' 내부 분수의 12지상을 복원한 작품으로 '12가지 동물'은 오래전부터 아시아인들에게는 숫자와 날짜 계산의 지표가 되었고, 각 동물마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서양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소재이기에 많은 외국인들은 이 12지에 관한 호기심을 보이며 자신의 띠를 알아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좀 더 아시아적인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는 소통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캄캄한 전시장에서 12지상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현대 미술 작품보다는 과거 시대의 유물을 감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욱 들었다.
아이 웨이웨이 전시장을 나오니 위와 같이 여러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위의 작품은 마치 액자에서 그림의 주체인 내용물이 기어 나오는 듯한 형상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고정관념이나 틀에 박힌 사고를 부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유쾌함이 느껴지는 작업이었다.
위의 작품은 같은 한 사람의 뒷모습을 아주 여러 번 반복하여 촬영한 작품으로, 뒤로 갈수록 머리카락이 사라져 가는 모습이 마치 인간의 노화를 보여주는 듯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니, 작가에 대한 흥미가 생기는 작품이었다.
아르켄은 현대미술관 답게 컨템포러리 한 설치 작업이 많았는데, 위의 작품은 엉뚱하기도 하고 올라가 보고 싶게도 만드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설치 작업이었다.
아르켄에서는 여러 주제의 소장품 전시 말고도 기획 전시를 선보이고 있었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덴마크 출신 작가인 마이클 크비움(Michael Kvium, 1955)의 개인전 '써커스 유로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유럽에서 유명한 비주얼 아티스트로 이번 전시에선 여러 매체의 작품들을 보여주었고, 작품의 대다수가 시각적으로 무척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었다.
캔버스를 분할해서 페인팅을 연결 시킨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가의 신작으로 보였다.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작가의 프로필 사진을 보았는데, 몇몇 작품은 작가를 닮아있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재미있는 요소가 되었다. 마이클은 현재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고 했고, 전시는 관광, 오락, 세계의 흐름, 난민, 전쟁 및 기후에 관한 질문이 담겨있다고 했다. 그의 작품들은 심오하고 그로테스크했으며 춤풀작의 수가 정말 많았는데도, 왜인지 모르게 나는 사진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마이클의 작품들 중 특히 설치 작업들은 그 묘사가 너무도 세밀해서 실제 모델이 서 있나 싶을 정도로 착각하게 하였다.
MY MUSIC 전시장에는 퍼포먼스로 유명한 팝가수들의 뮤직비디오가 프로젝터를 통해 이 벽 저벽 에 비춰지고 있었고, 전시장 입구에서는 헤드폰을 나누어주었다. 직원이 설명해주는 대로 휴대폰에 어플리케이션을 깔고 각 작품에 붙어있는 숫자를 클릭했더니 작품 화면에 맞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본 전시는 대중 음악과 뮤직비디오가 조각과 회화 및 설치의 합리적인 매개체가 된다고 설명했고, 실제로 미술관의 넓은 공간에서 익숙한 팝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더욱 집중이 되었다. 영상과 음악에 정신이 팔려 그런지 사진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다.
현대미술사에서 여러 논란으로는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아닐까 싶은 영국 YBA 출신의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책이나 매스컴으로만 작품을 접하다 눈앞에서 실제로 관람하게 되니 너무도 신기했다. 어떻게 동물 시체로 저런 걸 만들고 제작했을까 싶다가도 나중엔 도대체 "무엇"으로 작품을 만드는 시대가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 허스트는 대학 시절 우연히 죽은 시체들이 있는 영안실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그의 작품에 주제가 되면서 그는 여러 동물의 시체를 포름 알데히드 용액에 넣어 전시하였는데, 그러한 작품 제작 방법 때문에 그는 종종 악마의 예술가로 불렸다고도 한다.
데미안 허스트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품 <For the Love of God>을 촬영한 사진 작품, 실제 다이아몬드가 박힌 작품을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미술관에는 사진만 걸려있었다. 위 작품은 실제 해골을 백금으로 캐스팅하여 그 위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붙여 제작한 작품이다. 치아는 실제 인간의 치아라고 하니 뭔가 경이로우면서도 오싹함이 함께 느껴지는 작업이다. 작가는 위의 작품에 대해 "죽음의 상징인 두개골에, 사치의 상징인 다이아몬드를 덮어 욕망덩어리인 인간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조망하고 싶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허스트는 2007년 위 작품을 기폭제로 미술시장에서 인기가 폭발하였고, 최고 스타로 등극하며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작품 제작비를 부풀렸다는 의혹과, 1억 달러에 팔렸다던 것이 실제로 판매된 적은 없다는 점 등 이 작품은 논란의 중심에 서며 허스트를 더욱 유명하게 했다. 나 또한 미술계에 몸 담고 있지만 간혹 돈으로 얼룩지는 미술 작품을 보고 있자면 무언가 씁쓸함이 느껴질 때도 있다.
아르켄의 전시를 모두 보는 데는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집에서 가지고온 서양배 한 개와 초코바를 먹어도 허기가 져 아르켄 카페에 들렀다. 아직 백수이지만 사람이 또 쓸 데는 써야지. 해산물이 먹고 싶어 생선 요리를 주문시켰고 여러 종류의 생선이 각각 다른 방법으로 요리되어 나왔다. 음식의 맛은 미술관만큼이나 훌륭했기에 나는 파란 하늘처럼 기분이 싱그러워졌다. 그리고 역시나 주문한 음식을 모두 다 먹어 치웠다. 가격은 125kr(한화 23,000원).
아르켄은 다음에 또 다른 전시를 관람하러 방문하고 싶은 자연과 어우러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그때는 부디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올 수 있기를 살며시 바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