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과 다니다 애니메이션과로 재입학을 해버렸다
2010년 11월 나는 수능을 망쳤다.
재수는 없었다. 지방에 있는 4년제 학교에 입학했다. 영어영문학과는 그나마 내가 과목 중에 영어를 제일 좋아해서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1년 후 복수전공을 고민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만 고민하던 어린 시절, '일단 공부부터 하고 보자'라는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니까 '뭐로 먹고살지' 하는 고민을 하는 시기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대학교 2학년의 당연한 증상이었다. 중2병만큼이나 무섭다는 대2병.
영문학과는 보통 복수전공이 필수다. 크게 교육 아니면 경영, 신방, 정외 등등 두 갈래로 많이 선택한다. 아니면 아예 다른 어문 계열이거나. 선생님이 되는 건 정말 싫었다. 거기서 거기인 학교 복도를 30년 이상 거닐어야 한다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세상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복수 전공과목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놀랍게도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복수전공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걸로 먹고살아야 할 텐데. 그 생각이 스치자 앞이 깜깜해졌다.
그 순간, 수능이 끝난 후 나를 옆에 앉히시고 상담하시던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들렸다.
'그래. 잘 결정했다, 00아. 이 학교에 애니메이션과도 있던데…. 혹시 나중에 00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할 수도 있고.'
나는 중3 때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고 싶었다. 일전에 진학 상담에서 말씀드렸던 내 어린 시절의 꿈을 담임 선생님은 기억하고 계셨다. 그 말씀은 당시에 굉장히 의아하게 느껴졌다. 수능을 망친 제자에게 그래도 희망을 심어주고 싶으셨던 걸까?
어쨌든 그때부터 나는 또 다른 복수 전공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애니메이션 과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던 중,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예체능은 복수전공을 할만한 시간표가 아니었다. 영문과는 어떤 수업이든 두 시간씩 칼 같이 잘려있는데, 애니메이션과는 네 시간짜리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었다. 전과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건 복수전공을 할 수가 없다. 전과도 미친 짓이다. 하려면 입시를 다시 해야 한다.' 그런 결론에 이르고야 만 것이다.
2011년. 21살의 봄. 나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대한민국의 미술 입시 제도는 1도 모르면서 겁 없이 전공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영어영문학과에서 애니메이션학과로.
그로부터 9년 후에나 졸업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