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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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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인 Feb 14. 2023

반성문

1.

스물여덟 살쯤이었나, 그러니까 10년도 훨씬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20대 후반에 이르러 첫 번째 직장에서의 이직을 앞두고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힘들어했던 시기였다. 나의 주변에는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가는 친구들이 많았고 결혼을 하는 친구들도 하나둘 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이룬 게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젊은 나이인데 그때의 나는 무얼 다시 시작하기엔 늦은 듯했고 미래가 암담하게만 그려졌다. 누군가가 나침반이 되어주거나 시원한 해답을 주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던 중 '신내림을 받았다는 용한 점쟁이'를 만나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와 점술가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나의 과거를 맞추고 미래를 점친다는 것이 기대되었지만 두렵기도 했다. 미래가 궁금했던 만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나의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해체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 점술가가 나를 처음 본 순간 한 말은 "얼굴은 게으르게 생겨서 걸어오는 꼴을 보니 부지런하네?"라는 말이었다. 순간 그 점술가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나는 되물었다.

"제가요? 전 게으른 사람이 아닌데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아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혼자일지라도 어느 곳이든 외출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혼자 있을 때는 책을 보거나 목적이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다못해 T.V. 를 보더라도 확실한 오락거리가 되거나 지적 욕구를 채워줄 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선호하는 내가 게으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점술가의 다른 말들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일 싸우는 남자 친구(현재의 남편)에 대해 물어보니 '남자가 착하네.'라고 했고, 내 건강에 대해서는 '현재는 큰 문제가 없지만 40대가 되면 여기저기 아플 것이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남자 친구를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착한 남자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고, 건강에 대해서는 '저런 말은 나도 하겠다'라는 생각에 전혀 신뢰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점술가를 찾아갔던 기억은 가벼운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지나치게 되었다.


나는 잠시의 방황 끝에 이직을 하고 20대의 끝자락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30의 대부분은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며 보냈다. 일을 갖고 있었지만 육아를 병행하며 최선을 다할 수는 없었고 그게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시간을 쪼개어 취미 생활을 갖고 소소한 성취감들을 느끼며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쉴 틈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는 부지런하게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예전에 만난 점술가의 말대로 내가 발만 재빠르게 움직이는, 본성은 게으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자신이 해야 할 대부분의 일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컸고 나도 육아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자 지금까지 내가 이룬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여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꾸준히 해오긴 했지만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보긴 어렵고, 즐거움만을 찾는 일들을 해온 것 같다. 이번 한 해만을 되돌아보아도 공부를 해보자 다짐했지만 시작도 하지 않고 미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일로 찾아보고자 했던 결심도 스스로 무너뜨렸다. 읽은 책은 모두 다 리뷰를 쓰기로 한 작은 결심마저 귀찮다는 이유로 지키지 못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부질없는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온 것만 같다.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시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내가 하는 활동이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집안일을 미뤄두고 뜨개를 하거나 아이들 숙제를 도와줘야 할 때에도 내가 읽던 책을 끝까지 마치는 것이 중요했다. 언제나 나는 꼭 해야 하는 일을 하기보다는 지금 즐거운 일들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목표했던 일들을 지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말이다. 꼭 필요한 일들은 미루기 일쑤고 당장 즐거운 일들만 부지런히 하는 나는 마치 베짱이와도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았다. 한 해를 마무리할 연말이 되니 이렇게 나를 돌아보며 후회되는 일들에 대해 곱씹고 있다. 


얼마 전 만난 친구가 40대 초반의 여성은 가정이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있어서 오히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에 가장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정한 20-30대보다는 40대 여성의 안정감이 함께 일할 직원으로  적합하다고 했다. 무얼 하기에 늦었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친구의 일이 특수한 일이긴 했지만 나는 당연히 무슨 일을 하던지 시작의 기본값은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20대 후반에도 나의 나이가 무얼 하기엔 늦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다가 점술가를 찾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게으름에 무얼 시작하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하지 못할 이유들을 찾고 나의 게으름을 무마시키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나의 게으름에 대해 생각하며 예전에 만난 점술가의 말을 하나하나 곰곰이 떠올려 보니 지금 남편이 된 남자 친구는 '착한 사람'이 맞았고, 40대가 되고부터는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고 있다. 생각해 보니 용한 점쟁이가 맞았나 보다. 다시 점술가를 찾아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연말이다.


2.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는 나와 맞는 사람과 긴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나는 이미 연결된 끈은 절대로 끊어지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 끈이 팽팽해지거나 느슨해질 수 있고, 어느 부분은 두껍기도 얇을 수도 있겠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낯을 가리고 수줍음이 많은 나는 사람과 친밀해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내게 그런 인연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긴 시간을 지나며 나의 마음은 더 단단하게 상대방을 향한다고 생각했다. 미궁에서 돌아오는 테세우스의 길잡이가 된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처럼 나와 다른 사람이 연결된 인연의 끈은 내 인생의 많은 순간들마다 안내자가 되기도, 동반자가 되기도, 응원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와 연결된 많은 인연들이 나의 인생만큼 소중하고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늘 믿고 있다. 


그러나 사람과의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들을 반성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나와 친밀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무뚝뚝해지고 예의를 지키는 것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음과는 다르게 나의 행동은 진심을 오해받을 수 있을 만큼 무심하고 배려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가끔은 고민한다. 내가 친구의 어떤 모습이라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끔 잊어서 가끔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주제넘은 충고를 하거나 상대방의 배려를 구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던지기도 한다. 상대방을 향한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은 상대방의 마음에 소홀하거나 소소한 챙김 들을 하는 데에 무심하기도 하다. 변치 않는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친구와는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혼자 짐작하거나 가끔은 친구 앞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마음은 예전과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무심함을 상대방과의 친밀도와 비례한다고 비겁하게 변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가고 자꾸만 나의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나와 연결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하는 데에는 늘 소심하고 어려워한다. 이런 나의 태도를 반성한다.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락 한번, 따뜻한 말 한마디 더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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