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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인 Jul 13. 2023

품위 있는 일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사랑이나 우정, 명예와 같은 추상적인 관념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요즘 나는 눈에 보이는 가치로 셈할 수 있는 '돈'이 떠오른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돈, 우정을 쌓기 위해 써야 하는 돈,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불해야 되는 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아마도 내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주부이기 때문일까. 나는 생산력 없이 여러 가치들을 위해 소비만 하는 사람인 것만 같다. 이것은 하루를 분주하고 고되게 보내고 있지만 나의 노력이나 수고가 눈에 보이는 가치로 환산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족들을 위해 하는 집안일이나 육아는 세탁기나 청소기가 전원버튼을 누르면 작동하듯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맞춰 작동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하는 뜨개나 글쓰기는 작동된 일이 끝나면 하는, 마치 시간의 여백을 채우는 소일거리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의 결과물이 어떻든 간에 나는 그냥 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요즘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했다. 나의 자존감을 높이고 혼자만의 것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인정받을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눈치 보지 않고 쓸 약간의 돈도 있었으면 싶었다. 일하는 엄마가 되어 학원 라이딩을 하는 것 대신 아이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고, 학원 가는 길에 사 먹을 간식값을 넉넉히 챙겨주고, 아이들에게 김치찌개나 된장국을 끓여주기보다 친구들과 피자를 사 먹으라며 카드를 쥐어주는 엄마가 되면 오히려 아이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남편에게 뜨개로 옷을 만들어 주는 것보다 백화점에서 니트카디건을 사서 선물하면 더 기뻐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내가 하는 일들이 참 하찮게 여겨졌다.


혼자 고민을 하던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로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이런저런 알바 구인 사이트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역시 용기와 자신감이 부족했고 이것저것 재는 것이 많은 소심함 때문에 쉽사리 무얼 도전해 보기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직은 본격적으로 일을 할 여건이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나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일은 '재택근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필터링을 하여 검색을 해보니 재택근무를 하는 업무가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내 눈에 띈 구인광고 하나, 대본작가를 구한다는 광고였다. 어떤 대본인지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일이라면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했다.


글쓰기는 40가 막 된 나에게 너무도 큰 전환점이 되는 일이었다. 글을 잘 쓰는 것도, 오랫동안 글쓰기를 지속해 온 것도 아니지만 글쓰기로 인해 내 삶의 색깔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나는 스스로를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을 충분히 내 안에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이라 늘 가벼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후회하곤 한다. 그런 내게 글쓰기는 인생을 더 깊고 넓게 바라보게 해주는 일이었다. 글을 쓰며 나는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면하게 되었고 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현재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것은 늘 힘들었다. 솔직하게 써야 한다면 그게 힘들었고 거짓을 섞어야 한다면 그것도 힘들었다. 무얼 써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쓰지도, 그렇다고 쓰는 것을 포기하지도 못해서 힘들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힘겹게 하고 있는지를 내게 따져 물으면 나는 글쎄.라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글쓰기를 상상해 보면 힘겹게 밭을 일구는 농부가 생각나곤 했다. 봄부터 농사를 지어 가을에 수확을 하는, 너무나 고된 계절들을 보내지만 결국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곡식과 열매들을 거두는 자연의 느린 순환들이 글쓰기와 어울렸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힘겹게 지속하고 싶은 것 같다.


힘들어도 꾸준하게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면 내가 이것을 돈을 벌 수 있는 일로 하면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딱 맞는 일이었다. 대가가 따르는 일이라면 나에게 글쓰기는 당위성이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비록 내 스타일의 글이 아니더라도 경험을 쌓는다는 면에서 그 역시도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프리랜서 작가로의 채용을 위해서는 글을 써서 제출하는 면접을 2차에 걸쳐서 치러야 했다.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첫 번째 면접은 받은 줄거리를 대본으로 창작하는 일이었다. 줄거리가 약간은 억지스러웠는데 그것을 당연한 일이 되도록 글로 풀어내는 것 재미있었던 것 같다. 2차 면접은 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고 이 또한 새로운 일이어서 재미있게 끝냈다. 그리고 곧 프리랜서 계약을 하자는 답을 받고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하게 된 작업은 나 혼자 줄거리를 창작하고 대본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처음 작업이니 줄거리 창작 후 피드백을 받고 대본 창작 후에는 두 번의 피드백을 받기로 되어있었다. 줄거리를 야심 차게 써서 보낸 후 받은 피드백은 내 줄거리를 대폭 수정한 거의 새로운 이야기였다. 기본적인 토대만 살려두고 디테일들은 정말 매운맛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런 방향의 글을 원한다는 말에 수긍하고 그에 맞춰 대본을 쓰기로 했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 이야기를 당연한 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며칠을 짓눌려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내가 생각한 단 한 가지. '7만 원을 버는 일이야.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줄줄줄줄 글을 써 내려갔다. 글을 쓰며 내가 생각해도 너무 구구절절 변명만 나열하는군, 캐릭터가 너무 단편적이라 참으로 뻔하군,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에 없는 문자들을 썼다. 글자수를 채운다는 일념으로.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단 며칠이었지만 정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이들의 간식은 대충 차려주고 서둘러 라이딩을 나가고, 숙제를 도와달라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냈다. 배달음식이나 포장음식으로 상을 차리게 되고 설거지는 미루고 미루다가 식기가 부족해지면 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7만 원짜리 일이야. 곧 익숙해질 거야.'


위대한 작가들 중에는 생계를 위해 자신이 원하지 않은 글들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고 했다. 아니 많은 작가들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고뇌하는 조지 오웰이 된 것 같았고 상념에 빠진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 같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여러 장르의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하는 이 고된 작업이 꽤 괜찮은 일이고 나는 근사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으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 번의 작업 후에 그 일은 그만두게 되었다. 그 회사의 스타일에 나는 맞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내 작문 실력은 형편없어 보였을 것이다. 나는 그 한 번의 경험이 내게 호되게 매운맛을 보여줘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의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온종일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쓰다 지우다를 반복하며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너무 허탈했다. 그리고 사실은 글을 쓰며 나는 이런 글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를 반복해서 생각하던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런 일들을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했으면 괜찮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잘 해냈다는 마음이 들면 그때 말하고 싶었고 이 일에 대해 단 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잘 할 수 있을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잘되지 않으니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일이 모두 끝난 후 나는 번아웃 비슷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하찮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풍선이 된 것 같았다. 만약 뾰족한 돌부리에 걸리면 터져서 곧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다 최근 나의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정리해 준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보며 내가 누군가에게 이 일에 관해 말을 하지 못하고 나 스스로도 왜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나에 대한 한방을 알게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수백 명의 여성들이 번역을 하거나 저질 소설들을 숱하게 씀으로써 용돈을 보태거나 가족을 돕게 되었지요.

.........

18세가 후반 여성들 사이에서 드러나 지극히 활발한 마음의 행위 - 대화와 모임, 셰익스피어에 관한 에세이 쓰기, 고전 번역 등 -는 여성이 글을 씀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을 때에는 경박했던 일이 돈으로 위엄을 갖추게 됩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을 때에는 경박했던 일이 돈으로 위엄을 갖추게 됩니다.> 라니.

이거였다. 7만 원이라는 가치를 가진 일이라고 인정하자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던 일이 품위를 갖게 되었다. 나는 7만 원짜리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품위 있던 일을 내가 못하게 되어서 힘든 거였다. 단지 글에 대한 비판을 받아서도, 나 스스로 글솜씨에 대한 혐오에 빠져서도 아니었다. 난 돈을 못 벌어서 힘든 거였다. 내가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였는데, 그리고 돈으로 나의 위신을 세우려고 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너무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되는 것이 맞았다. 말이 안 되는 장면도 글을 읽는 사람에게 결국은 말이 되도록 믿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그 담당자의 말은 내게 상처를 남겼다. 기본적인 창작 실력이 안된다니. 저기요, 사람에게 개똥을 던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성이 결여된 게 아닌가요. 되묻고 싶지만, 그러나 나는 다시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이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쩐지 품위 있는 일이란 돈을 버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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