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맞는 건지, 내가 틀린 건지,
휴직하고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첫 달은 아이의 입학 스케줄만 맞춰 보냈고 둘째 달은 나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보냈으며 셋째 달이 돼서야 흐름을 맞춰 갈 수 있는 안정감을 찾았다. 하루의 패턴과 일주일의 일정을 정해 놓고 대부분을 맞추어 계획대로 보낼 수 있는 시간에 감사해 본다.
휴직하기 전까지 나의 시간은 항상 분주하거나 정신없거나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늘 바쁘기만 했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그런 삶들을 살고 있었고 한 번씩 올라오는 감정에 대한 컨트롤이 어려워지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사소함에 감사하는 일 보다 누군가에게로 탓을 돌리는 환경에서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 새로운 상품들이 줄지어 쏟아지는 통신회사인 만큼 절대적인 숫자는 무시할 수 없었고, 늘 기준치 안에 들으려 애쓰며 금전적인 이득을 위해 설득하고 훈계해 가며 때로는 꼰대들이 한다는 고지식한 틀 안에 갇힌 감정적인 소모에 늘 시달리고는 했다
잘되면 제 탓이고 못되면 남 탓이었다. 잘 될 때는 당연한 줄 알지만 못 될 때 돌아올 남 탓을 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정체성에도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이며 여긴 어디인지, 내가 잘되기 위함인지 네가 잘되기 위함인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 생각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다. 3층 사무실 창문 앞 책상에서 시작되어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한 겉모습의 회사 빌딩의 정문 앞까지, 기나긴 실타래를 늘어트린다.
그렇게 또 나의 문제인 것 같다가도 너의 문제라고 탓을 하기 일쑤였다. 일희 일비 하며 감정 소모하지 말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들은 좀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너도 반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관계가 나타날 때마다 애꿎은 감정선을 끌어올리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긴 목마름에 따보는 캔 맥주 한 캔이 전부였다.
어른의 길은 어디쯤 있을까 고민해 본다. 별거 아닌 일에 오락가락하지 않고 나의 기준을 잡아 결승선까지 양쪽 선수의 선을 넘지 않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도록 페이스에 맞춰 잘 달리고 싶다. 나의 문제인지 너의 문제인지를 탓하기 전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길 수 있는 어른의 마음을 되새기며 살고 싶다.
그러려면 잘 살아야 한다.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그렇게 연습의 하루하루가 모여 많은 날이 쌓이고 나면, 이랬다 저랬다 요지경 세상 속이 아닌 비로소 내가 살고 싶은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져본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그 희망의 실타래를 풀어 멀리멀리 갈 수 있도록 아주 길게 늘어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