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할머니의 마음이 있다.
아빠의 고향에는 쪼르르 개울물이 흘러간다. 아직은 차가운 3월의 개울물 속에는 바위틈 사이마다 다슬기가 붙어 있고 제법 날쌘 송사리 떼도 헤엄쳐 간다. 그 옆 축사에는 얼룩빼기 황소들이 젖소들 틈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고 그 앞에는 갖가지 작물들의 비옥한 터전이 펼쳐진다. 그리고 성격 좋아 보이는 야트막한 산새가 온 동네를 휘감고 있는 아빠의 고향이다.
아빠의 고향은 청주시 미원면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당이 커다란 시골집에서 다섯 명의 고모들 틈 속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빠는 배불리 먹지는 못해도 다섯 누이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어릴 적 언니와 나는 방학이 되곤 하면 아빠가 자라난 시골집에서 할머니의 사랑으로 여름을 보내고 겨울을 보냈다. 방학이 시작되고 우리가 시골집에 도착하는 날은 할머니의 손이 분주하다. 갓 지은 가마솥 밥에 두부와 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넣고 짭짤한 새우젓이 한 움큼 들어간 된장찌개를 끓이고, 먹기 좋은 크기로 맵지 않게 볶아낸 고추장 불고기에 텃밭에서 뜯어온 손바닥만 한 상추가 한가득 올려진 밥상을 차려 내느라 할머니의 부엌은 희뿌연 연기를 연신 뿜어낸다.
시골에서의 하루는 새벽 이웃집 닭들이 울어대면서 시작이 된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아침을 먹고는 했는데 할머니의 아침상 끝에는 언제나 구수한 숭늉이 있었다. 가마솥에 불을 지펴 밥을 뜨고 나면 조롱박에 꽉 채운 물 한 바가지를 가득 부어 노릇하게 달라붙은 밥알들은 거둬낸다. 가끔은 쓴맛이 솔솔 올라오기도 하지만 숭늉까지 마셔야 소화가 잘된다는 할머니의 말을 언제나 철석같이 믿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할머니는 집안일로 우리는 밖으로 놀러 다니기 바빴는데, 시골에는 다행히도 또래 친구들이 몇 있어 우리는 그 틈바구니에 섞여, 여름에는 개울가로 겨울에는 눈 덮인 동산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야트막한 동산 아래로 해가 넘어가면, 밥 짓는 연기가 나고 아이들을 불러댄다. 할머니도 우리의 이름을 연신 불러가며 저녁의 때를 알린다. 할머니의 밥상은 언제나 정성이 가득했고 우리의 방학은 포동포동 살이 오른다. 이른 저녁을 먹고 다 같이 TV 앞에 있다 보면 슬금슬금 허기가 찾아온다. 겨울방학의 그 시간이 좋았다. 할머니는 온기 없는 뒷방에서 다홍빛 홍시를 꺼내오거나, 그 시절 안방에 하나씩은 자리 잡고 있던 화로에 고구마를 구워 준다. 그리고 그것도 아닌 날에는 커피포트에 보글보글 물을 끓이고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다는 휘황찬란한 커피잔을 꺼내 고소한 율무차를 내어준다.
시골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방학은 외롭거나 힘들지 않았다.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고 있을 아들 내외를 위해, 엄마 아빠를 떠나 어색한 시골집에서 지낼 손녀딸들을 위해 할머니는 고기반찬을 만들고 아껴두었던 다락방의 과자를 꺼내준다. 오일에 한 번 열리는 장날이면 누르스름한 종이에 기름을 잔뜩 뺀 닭튀김을 사 와 하나하나 살을 발라 어린 새 같은 손녀들의 입에 넣어준다.
아빠의 고향은 어느새 앵두 같던 두 딸의 고향이 되어 주었다. 개울이 흐르고 얼룩빼기 황소가 울고 기름진 논밭에 인심 좋은 동산이 있는 곳, 지금도 그 시골집을 찾아가면 나를 강아지라고 불러주는 둥글둥글 인자한 할머니가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 같은 곳, 아빠의 고향에는 우리를 포근히 안아주던 할머니의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