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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윤로윤 Jul 28. 2023

[괜찮은 인생을 살고 싶어] 여덟 살에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지 않지만 해내야 하는 일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두 달이 흘렀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아이는 봐주지 않아도 어느덧 혼자서 잠을 자고 꺼내준 옷을 단추까지 잠그며 차려입고 학교 준비물을 빠트리지 않고 챙긴다. 가끔 일이 있어 외출한 사이에 학교를 마치고 혼자서 집으로 오는 날에는 외투는 옷장에 걸고 손발을 씻고 좋아하는 잠옷을 꺼내 입고 갈아입은 옷은 세탁기에 넣고 먹고 싶은 간식을 쟁반에 옮겨 닮아 야무지게 젓가락으로 먹고는 깨끗하게 싱크대에 치워두기까지 한다.


두려움 많고 내성적인 아이라 처음 겪는 일에는 시작하기 전까지 남들보다 많은 시간이 들고는 했다. 나를 닮은 성향을 맞춰줄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다그치기보다는 이해해 주고 설득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 애쓴 날들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넘어지지 않으려고 항상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나서야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버거운 날도 많지만 두려움 가득한 세상에 나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나 또한 그랬다. 나의 여덟 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밤의 시간이었다. 단층 주택으로 이사 가고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었다. 나는 여느 때 와 다름없이 학교에서 돌아와 작은방에 엎드려 숙제하고 있었는데 학교에 있을 언니가 갑자기 마당에서 나를 힘겹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곧바로 왜 이렇게 일찍 왔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신기하게도 언니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헛것을 봤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 믿어줄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언니는 연분홍 코사지 달린 흰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빠와 먼저 저녁을 먹고는 안방에 걸려있던 긴 거울을 보며 나는 왜 이렇게 심심하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두운 밤이 되고 나서야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정확히 말하면 무섭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엄마는 언니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말했다. 거울을 보고 있던 나는 가슴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저 아래로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서둘러 채비하고 엄마를 따라 아빠와 나는 언니가 있는 응급실로 향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언니는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말랐었는데 그 작은 몸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성한 곳 없었다. 평소에 말수가 없던 나는 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뚝뚝 흐르고 만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이 된 언니는 울지 말라며 나를 챙겨준다. 병원 사람들이 엄마 아빠에게 속삭인다. 살아있는 게 천운이라고.


학교가 끝나고 합창단 연습을 가기 위해 파란불이 되자마자 뛰어가던 언니는 신호를 보지 못하고 속도를 내던 택시에 받혀 50미터를 날아갔다고 한다. 사고가 난 곳은 천변 도로였고 천만다행으로 개나리가 줄지어 서 있던 넝쿨로 떨어지는 바람에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키도 작고 살도 없어 30킬로그램도 채 되지 않았던 언니의 왼쪽 다리는 부러져 차디찬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고 그렇게 두 달이 넘는 병원 입원했다.


엄마는 언니의 병간호를 위해 식당 일을 쉬어야 했고 나는 엄마와 언니의 빈자리를 온전히 느껴가며 아빠에게 숙제를 물어보고 아빠에게 머리를 묶어달라고 해야 했다. 언니가 입원한 이후로 학교가 끝나면 나는 매일 언니가 있는 병원으로 찾아갔고 거기서 같이 밥도 먹고 숙제도 하고 깜깜한 밤이 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돌아오는 밤이 무서웠다. 깜깜한 밤을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언니는 목발을 짚고 병원을 나와 한참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는 했다. 그래봐야 언니는 열한 살이었고 나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지만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한 채 버틸 수밖에 없었던 무서움을 달래 갔는지 모른다.


여덟 살이 된 아이가 스스로 챙기는 것 하나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서른여덟 살이 된 나도 휴직이라는 시간 동안 스스로 하고 싶었던 일을 챙기며 사는 것에 감사해 본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내야 했던, 나의 여덟 살 두려운 밤길을 조용히 따라가 본다. 엄마가 무서울 때마다 되뇌어보라고 알려준 기도문과 언니가 얼른 나아 집으로 올 수 있게 해 달라는 혼자만의 기도를 쉴 새 없이 하며,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발걸음으로 여덟 살의 내가 빠르게 걸어간다. 잔뜩 긴장한 채로 밤길을 걷는 아이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 다독여 주고 싶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따뜻한 목소리를 건네고 싶다. 어두운 밤길은 아직 조금 더 남았지만,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만큼은 남들보다 먼저 배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오늘도 내일도 언니가 건강히 퇴원하는 날까지, 집으로 혼자 돌아가는 어두운 밤이 무섭지 않도록, 따듯한 손길을 내어 줄 서른여덟의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깜깜한 밤길을 환히 비출 수 있게, 그렇게 누구보다 따뜻하게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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