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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윤로윤 Oct 10. 2023

[괜찮은 인생을 살고 싶어] 물냉면

소울푸드가 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욕구가 높지는 않은 편이다. 그런 내가 사시사철 찾는 음식이 있는데 바로 ‘물냉면’이다. 이름만 들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글을 쓰는 지금 시각이 오전 6 시인 것을 감안하면, 나는 분명 물냉면 애호가 맞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대학교 때 여름 방학을 앞둔 무더운 날씨가 시작되면, 학교 앞 백반집에서 먹던 어딘가 심심한 냉면이었을까? 아니면 고등학교 때 나풀나풀 여름 하복을 입고 종종 찾아가던 새콤한 냉면이었을까? 그때도 아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중학교 때 먹던 중국집의 냉면이 불현듯 떠오른다. 맞다! 냉면을 좋아하게 된 시기는 중학교 때부터였다.


나에게는 가장 오래된 친구 두 명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동네에서 학원 다니며 만난 친구들인데, 자연스레 친구들과 같은 중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는 우리는 말 그대로 잠자는 시간만 빼고 늘 함께였다.


그중 한 명의 친구 집은 부모님이 늦게까지 일을 하시는 바람에 늘 상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어주었고, 주말이면 친구네 집에서 삼시 세 끼를 모두 해결하는 날들도 많았다.​


매번 죄송하게도 친구네 어머님이 해주신 밥과 반찬들을 얻어먹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친구 한 명이 물냉면을 제안하면서 근처 중국집의 배달 스티커를 꺼냈다. 그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집 전화로 전화를 걸어, 가지고 있던 용돈을 모아 셋이서 물냉면 두 그릇만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고는 더운 바람을 덜덜 뿜어내는 선풍기 앞에 모여 앉아, 물냉면이 과연 맛있을까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고, 때맞춰 도착한 얼음 알갱이 동동 떠 있는 냉면을 한 입 맛보고는, 우리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더웠던 여름날 우리에게 배달된 냉면은 칡 냉면이었고, 면발의 탱탱함을 젓가락으로 들춰내 입으로 넣기 직전까지 면발에 애절하게 달라붙어 있는 얼음 알갱이 덕분에, 칡 냉면의 더욱 쫄깃한 식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냉면의 핵심은 지금도 생각나는 속 시원한 동치미 육수였다. 거기에 왠지 겉모습은 무섭게 생겼지만 알고 보면 정이 많은 주방장 아저씨가 만들었을 매콤한 양념장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그 이후로 무더운 여름날의 주말이 돌아오면 우리는 어김없이 친구네 아지트에 모여 물냉면을 시켜 먹는 일은, 우리의 즐거웠던 일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사춘기 소녀들의 여름은 동네 중국집에서 여름에만 만들어주는 칡 냉면을 먹으며, 어쩌면 한 번씩 올라왔을 이유 없는 반항들이 식혀졌는지 모른다. 그 사춘기 소녀 중 하나인 나는 지금도 입맛이 없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혼자 있을 때 방해받지 않고 제대로 맛을 음미하며 먹고 싶은 음식이 물냉면이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은 없어졌을 그 오래된 중국집을 찾아간다면, 매번 셋이서 두 그릇만 시켰던 걸 알고 반지르르한 은색 그릇에 꽉 차도록 칡 냉면 사리를 곱빼기로 넣어주셔서 감사했다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 칡 냉면은, 기분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항상 제일 먼저 찾는 음식이 되었다고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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