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을 받은 초록의 위로
이따금씩 한 번은 집 가까이에 있는 화원에 들린다. 갖가지 식물들이 서로 고운 자태를 뽐내며 저마다 예뻐해 주는 손길들을 서슴지 않고 기다린다. 고르고 고른 식물들을 집으로 데려와 듬뿍 물을 주고 햇볕 잘 드는 곳을 찾아 자리를 내어 준다. 그렇게 온종일 보고만 있어도 나의 시간들은 따뜻해진다.
어릴 적 우리 집에 식물들이 자라기 시작한 시기는, 아마도 지겨웠던 세 살이 를 벗어나 단층 주택으로 이사를 하면 서였다. 작고 볼품없던 단층주택에는 옥상이 있었는데, 아빠가 꼼꼼하게도 칠해 놓은 초록색 대문 옆 계단을 밝고 올라가면 집보다는 훨씬 넓어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엄마와 아빠는 그곳에 갖가지 채소와 과일, 꽃나무도 심어 가며, 어쩌면 가장 힘들었을 시기를 버티셨는지 모른다.
그 옥상에는 솜씨 좋은 아빠 덕분에 야무진 평상이 생겨났고 나는 그 평상에서 꽤나 많은 시간들을 흘러 보냈다. 구구단을 외울 때도, 글짓기 숙제를 해갈 때도, 친구가 없던 날에도 나는 평상에 누워 높고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뒹굴 거렸고, 옥상에 심어진 갖가지 식물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는 날들이 이어져갔다.
그러다 해 질 녘이 되면 엄마는 밥을 짓기 시작한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 가면 엄마는 옥상에서 아직도 뒹굴 거리는 나에게 저녁거리 채소들을 주문하곤 한다.
청양고추 다섯 개, 오이 두 개, 상추 스무 잎, 평소에 아빠가 일러준 대로 가지가 꺾이지 않도록 꼭지를 잘 비틀어 딴다. 아홉 살 어린 손놀림 뒤에는 미안함이 숨겨져 있다.
열심히 키워 냈는데 매번 따가기만 하는 게 미안하다며 청양고추에게, 오이에게, 상추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는지 모른다.
엄마집이 아닌 나의 집에도 식물들의 자리가 생겨 난 건, 평생을 살아도 좋을만한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였다. 엄마 아빠가 어린 시절 단층주택으로 이사했을 때의 마음과 같았는지, 나는 자연스레 식물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살 수 있었던 고무나무를 시작해 알로카시아, 몬스테라, 스타피필름, 페페로미아, 유칼립투스, 레몬밤, 보스턴 고사리, 그리고 아이가 매 년 식목일이면 가져오곤 했던 귀여운 방울토마토와 앙증맞은 딸기나무까지, 식물을 들이는 일은 나에게 그냥 지나치기만 할 수 있었던 일상에 소소한 행복이 되어 주었다.
폴폴이, 풀풀이, 고구미.
장미허브에서는 젤리향이 폴폴 나서 폴폴 이가 되었고, 유칼립투스에서는 코가 시원해지는 향이 풀풀 나서 풀풀이가 되었다. 처음 들였던 구근 식물인 히아신스는 고구마를 닮아 점 하나 빠진 고구미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아폴론의 마음도 모른 채, 어여쁜 꽃을 피우기도 전에 지어진 아이의 작명으로 조금은 미안해지기도 한다.
주말 아침이 돌아오면, 집 안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식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시원한 물줄기를 가득 뿌려 준다. 커피를 한 잔 내려 화분에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햇볕 잘 드는 창가 앞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렇게 햇볕 아래 초록의 기운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주간 몰아쳤던 고단함과 미움들이 햇볕 아래 녹아져 내린다.
초록을 비추는 햇볕의 시간들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고작 물을 주고 볕 좋은 자리만 내주었을 뿐인데, 초록의 식물들은 나에게 “괜찮다, 괜찮다” 하며 마음을 정화시키는 커다란 위로가 되어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