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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Jan 02. 2023

엉덩이 육아

엉덩이만큼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이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매력 있는 것들은 반전의 매력을 함께 갖고 있을 때가 많다. bitter and sweet의 초콜릿이나 우락부락 근육질 남성이 블링블링한 귀여움을 동반하는 경우(일례로 마동석 씨). 최근에는 선과 악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며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는 캐릭터의 진양철 회장까지. 한 면의 매력에도 홀릴만한데 뒤집으면 전혀 다른 면의 매력이 또 있다면 오래도록 그 매력에 헤어 나오기 힘들 법하다. 나한테는 엉덩이가 그렇다.


인간의 신체 중에서 엉덩이가 그려내는 그 볼록한 곡선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다. 그런데 그 엉덩이의 속사정은 또 어찌나 재미있는지. 애들에게도 엉덩이가 최고다. 엉덩이 속 방귀, 똥이라는. 상대를 마구잡이로 포복절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당연할 것이다.


휴 그랜트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에서 신혼을 왜 ‘허니문’이라고 말할까에 대해서 연인과 나누는 농담이 나온다. 영화 속 휴그랜트가 말하길, 허니문은 첫날밤 신부의 엉덩이를 보고는 “honey moon!”이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된 건 아닐까 하는 농담을 연인에게 한다.


그리고 이런 노래도 있다. 아름다운 엉덩이의 뒤태를 보고는 탄복한 나머지 “어머님이 누구니?”라고 외치는 노래말이다. 엉덩이에 매력을 느끼는 이는 당연히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째를 낳고 나서 엉덩이에 대한 또 하나 남다른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기특함이다.



둘째가 4살 때였다. 친정집 거실에서 날쌔게 뛰어오던 녀석이 방을 거쳐 화장실로 직행하고는 화장실 바닥에 훌러덩 뒤로 나자빠져버린 일이 있었다. 머리로 떨어졌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아찔한 일인데 다행히 녀석의 엉덩이가 바닥에 먼저 떨어졌다. 다행히 머리는 이상 없어 아이는 놀란 마음에 몇 분 울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일이 없듯이 열정적으로 뛰어놀았다. 그때도 느꼈다. 나는 이 둘째의 엉덩이가 견딜 수가 없다. 못 견디게 기특하다.  


둘째가 처음 세상에 빛을 봤을 때, 나는 그 아이를 안아주지 못했다. 내가 제왕절개 후 호흡이 잘 되지 않아 호흡기를 달고는 너무 괴로워했고 아이도 목놓아 울지도 못하며 호흡곤란을 겪었다. 한번 안아보실래요?라고 물어오는 데 차마 안아주지 못했다. 5개월 동안 침대에만 누워지내며 유산의 위기에서 버텨왔었기에 그 임신과 출산의 과정이 고행과도 같았다. 그 순간에 ‘나는 내 할 일 다 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모성이 그렇게 인내심 부족이었다. 그때 한번 안아주지도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3주가 지나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를 처음 집으로 데려온 날. 기저귀를 갈아주다 아이의 엉덩이를 보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엄마 뱃속에서 잘 먹지 못해 2킬로로 태어난 남아는 너무나 바짝 마른 채로 엉덩이살 마저 없었다. 아이의 항문을 가려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 드러나와 있는 항문은 기저귀에 허물어 피투성이었다. 기저귀를 갈 때마다 항문을 씻길 때마다 천장이 떠나가라 울던 아이의 울음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그렇게 엉덩이 없이 태어난 내 아이가 몇 해를 지나 통통하게 살이 찬 엉덩이로 용케 엉덩방아를 찧어 아찔한 순간을 면했다. 기특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기적인 엉덩이다.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엉덩이다.


그런 둘째가 어느덧 여섯 살을 바라보고 있다. 요즘 즐겨하는 역할놀이가 있는데, 내 일상 중 가장 고난도 과업이다. 일단 놀이의 시작은 항상 엄마 토끼가 아기 토끼를 먼저 출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녀석은 아기 토끼 달랑 하나만 담당(그것도 말 한마디 못한다는 아기로)하고, 나머지 엄마 토끼, 아빠 수달, 형 브라키오사우르스, 누나 펭귄, 자동차 친구 2명까지 모조리 내 담당이다.


그런데 더 피곤할 노릇은 이 토끼집안이 당최 평안한 날이 한순간도 없다는 것이다. 지진에, 화산폭발에, 공룡 떼 공격에, 괴물 로봇에. 자동차 공격에서 겨우 아기 토끼를 구출해서 피 철철 흐른다며 응급 수술까지 해서 기껏 살려놨었는데 아이는 숨돌릴틈도 없이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났데~.”라는 지령을 내린다. 하…. 나는 으악! 안돼! 으흐흑, 조심해! 살려주세요! 구해주세요! 여보! 아기 토끼야!!!!! 따위의 열연을 해내야 한다. 피곤하고 지친 내가 눈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눈 크게 떠!!!”라며 호통을 친다.


지겹고 지친 나도 꾀를 내어, ‘엄마 잠깐 쉬 누고 올게’ 하고는 잠시 화장실에 피해 있는다. 아이가 혼자 놀이에 빠져있을 때를 기다려 거실로 나와 집안일을 한다. 며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아이와의 놀이를 피해 다닌다.


어제 새해를 맞아 옷정리를 하려 이 옷 저 옷을 입어보았다. 올해도 청바지가 맞지 않는다. 용케 발을 거쳐 허벅지까지 올라온 녀석인데 힙을 못 넘긴다. 언젠가 이 녀석이 힙라인을 너머 허리까지 안정적으로 안착할 날이 다시 오리라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다짐을 하고는 옷장 깊숙이 청바지를 넣는다.


연구자는 엉덩이로 말한다는 얘기가 있다. 성실히 오랜 시간 책상 앞 의자에 눌려 앉혀진 엉덩이의 생김새는 아마 달라도 많이 다를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거울 앞에서 청바지를 당당히 거부한 내 엉덩이를 살펴본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나 하고 말이다. 중력의 무게? 성적 매력을 잃어간다는 아쉬움? 열등감? 그러다 문득 이 엉덩이로 바닥에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파가 아닌 바닥말이다.


아이들은 주로 바닥에서 논다. 바닥에서 노는 아이들 곁을 나는 얼마나 지켜주었었나. 엉덩이를 바닥에 눌러 붙인 채 말이다. 돌아보니 그럴 때마다 내 엉덩이는 소파나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거울에 비친 엄마의 엉덩이가 말한다. 아이들 곁을 더 지켜주라고. 주저 말고 바닥에 아이와 함께 앉으라고.


 이 글을 마무리하기만을 둘째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또다시 토끼놀이를 준비하고 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는 식탁의자에서 일어나 거실 바닥 한가운데에 아이와 나란히 앉을 것이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오늘은 네가 아기 토끼랑 누나랑 형 맡아줘~.”하고 부탁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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