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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May 11. 2023

스푼과 그림자 귀신의 놀라움

왜 이 일을 하고 있습니까. 직업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현대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툭 던져 놓고 갔거나. 식사자리에서 음식 대신 이런 질문이 날아오면 나는 보통 진지한 대답보다는 스푼을 잡거나 이상한 귀신 그림을 보여준다. 스푼과 귀신은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한 두 가지 도구다. 뻔하지만 곤란한 질문을 대하는 나름의 진지한 대응 방안이랄까. 아니면 (그림을 대하는) 마음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다 전하지 못할 말들이 있어, 이상한 대답을 해서 잠시 숨 돌릴 틈을 만들어 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숨 돌릴 틈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천천히 마음을 풀어 보려고 한다.


시각 언어는 배우기가 참 쉽다(사실 우리 모두 이미 어느 정도 배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참 어려워한다. 식사를 하며 어떤 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물어오면 조금, 침묵의 시간을 가진 뒤 스푼을 질문한 이에게 돌려놓는다. 조용히 밥이나 먹자는 무언의 메시지는 아니고 스푼의 방향을 돌림으로서 ‘이거 한번 먹어 볼래?’라고 말을 거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스푼과 함께 잠시 뇌의 일정 부분을 그 사람을 위해 쓴다. 말하자면 사고를 나누는 것이랄까. 한자 그대로, 배려(配慮)다.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었더니 웃었다. 역시 엉뚱하다나. 나름 진지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


스푼의 손잡이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스푼이 그렇게 멋있게 생기지 않았어도, 방향만 바꿨을 뿐인데도 대개는 의사 전달이 된다. 말 그대로 시각 언어(visual language)다. 몇만 년 전의 원시인들도 이런 식으로 소통하지 않았을까. 사냥을 하고 돌아와서 우가우가거리며 양팔을 교대로 올려 승리를 축하한다. 충분히 축하의 시간을 공유한 뒤 누군가는 사냥물을 해체해서 고기를 굽고 누군가는 동굴에 오늘의 놀라운 사냥을 기세 좋은 드로잉으로 기념한다. 그리고 모두 모여 사냥의 성공에 감사하며, 신께 기도를 드리며 잠에 든다. 그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놀라웠을 것이다. 편안하게 모닥불을 켜고 잠에 들지만 동굴 입구에서 나는 바사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횃불이 만드는 은근히 거대한 그림자에 매번 놀라지만 이윽고 나타난 동료의 모습에 안도한다.


그림자가 그들에게 얼마나 놀랍게 느껴졌을까. 우리가 어릴 때 자주 하는 그림자놀이도,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느끼는 무서움도 사실 유전자에 새겨져서 이어져 온 전통이 아닐까 진지한 의심을 하는 사람인 나로서는, 이 별 것 아닌 원시인 이야기가, 그림의 놀라움을 잘 말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항상 넌지시 던져본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 숨 돌린다. 사실 설명을 위한 삽화(illustration)를 그리기 위해서다. 아무튼 나는 귀신 그림을 그린다. 한창 식사 중인 테이블 위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어 엉뚱한 모습으로. 무엇하냐며 웃고 있는 친구를 옆에 두고.


내가 그리는 귀신은 그림자 귀신이다. 다르게 말하면 실루엣 귀신이다. 묘사도 그 어떤 것도 더하지 않은 순수한 평면 그 자체. 종이 위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그리고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형태다. 실루엣 귀신이 양팔을 번쩍 올리고 놀래키는 그림을 살짝만 기울여 그림이라는 사각형 틀의 뒤쪽에 배치하면 실루엣 귀신이 놀라는 그림이 된다. 마치 어릴 적에 하던 색종이 잘라서 배치하기 놀이처럼, 아직 풀로 붙이지 않은 콜라주의 형태로 놀라움은 다가온다. 귀신을 앞으로 기울이면 놀래키는 귀신, 뒤로 기울이면 놀라는 귀신. 놀랍지 않나요. 여기까지 이야기해 주었더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세 번째로 웃었다.

 

가장 기본적인 감정은 놀라움이다,라는 것은 순전히 내 주장일 뿐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감정, 내 옆의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감정, 밤에 가로등 불빛에 뛰어드는 나방의 감정, 무수히 많은 감정들의 근원은 어디일까. 감정들은 독립적일까.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연관된 감정을 우리는 느끼고 있는 것일까. 글을 계속 써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먹먹함이 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과 글로서 전달이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원시인이 사냥에서 돌아온 후에 우가우가 소리를 질러대지만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살벌하고 숭고한 전투를 벽화로 기록했던 것처럼. 그들의 스푼은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었을까.


언젠가부터 왜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만이 남아 있었다. 스푼과 그림자 귀신은 아직까지도 놀랍고 앞으로도 놀라울 예정이다. 형태와 그것의 방향과, 사각형 틀 안의 배치는 무한하다. 그만큼 또 무한한 감정. 고작 스푼 하나로 다 떠지지도 않고 전달되지도 않지만, 그래서 글이라도 써 보자는 마음이지만 아무튼 그림은 계속 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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