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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Nov 28. 2020

문화를 표준화해도 되나요?

'뉴욕'을 수식하는 다양한 관형어 뉴요커가 아닌 사람들의 선망과 동경, 심지어는 질시의 표현을 담고 있다. 뉴욕은 '세계 패션의 중심지', '금융의 국제 허브'라는 다소 명예로운 관형어도 갖고 있는 반면, '극단적 양극화의 도시', '자본의 천박함을 보여주는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관형어도 갖고 있다. 뉴욕을 규정짓는 관형어 중에는 '뮤지컬의 본고장'이라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정설도 있다. 뮤지컬 폐인뿐만 아니라 뮤지컬 맹인도 뉴욕에 가면 종종 브로드웨이를 방문해서 뮤지컬을 관람한다.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어깨뼈를 한껏 추켜올리며 자신의 문화적 고상함을 자랑한다.


이렇게 브로드웨이를 뮤지컬의 메카로 만든 일등공신은 다양한 분장의 '고양이들'이다. 뮤지컬 '캣츠(cats)'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브로드웨이에서 캣츠를 관람하고 '역시 캣츠는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에서 봐야 제대로 본 것이지.'라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멸시의 방에 가두어 버린다. 이들의 인식 속에는 뉴욕의 캣츠와 서울의 캣츠는 고급 품종의 고양이와 길고양이만큼의 간극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뮤지컬 캣츠가 국제 표준 규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모나미 볼펜에 자부심의 상징으로 찍혀 있었던 KS(Korea Standard) 마크를 기억하는 사람도 캣츠 역시 NS(Newyork Standard) 마크를 부여해도 될 만큼 표준화된 공연을 선보인다는 사실에 아연할 것이다. 공연문화의 표준화라니? 뒤집어 신은 양말만큼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실제로 캣츠는 표준화되어 공연된다. 캣츠의 라이선스를 관리하는 ‘더 리얼리 유스풀 그룹’에서 세부적인 악기 구성부터 무대장치의 구조와 디자인 등을  정해 놓았다. 그리고 국제 공연에도 이 규정을 준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캣츠를 보기 위해서 이카나미클래스증후군의 위험을 무릅쓰고 14시간이나 날아서 뉴욕으로 갈 필요가 없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캣츠를 감상해도 뉴욕의 캣츠와 동일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여기가 뉴욕이로구나.'라고 자기 암시만 주면 끝.


캣츠를 표준화한 이유는 공연의 질을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음식의 질을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낯설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부는 2012년에 ‘김치산업진흥법’이라는 눈물겨운 법을 제정했다. 왜 눈물겹냐면 당시에 짝퉁 김치, 즉 중국산 김치와 일본의 기무치가 우리의 식탁에까지 광범위하게 마수를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법률에 김치의 품질 표준화 및 품질향상에 관한 사항이 들어있는데, 그 내용에는 현재 지역별로 김치 레시피가 다르고 맛도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 문화인 김치의 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국제적인 경쟁력이 떨어진다, 그러니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라도 김치 맛을 표준화해서 외국인들이 한국 김치 하면 모두가 동일한 맛을 떠올리도록 해야 한다는 실로 절박한 바람이 담겨 있다.


우리 집안에도 매우 특별한 김치가 있다. 큰누님의 김치 사랑과 큰매형의  낚시 취미가 만나 열기 김치라는 김치의 혁명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김치에 바닷고기인 열기를 넣어서 독특한 김치를 만들어 먹는 큰누님은 여차하면 법률을 위반해서 감옥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귀하는 열기 김치라는 표준규격에 전혀 맞지 않는 김치를 만들었으므로 김치산업진흥법 위반으로 배추 백 포기의 벌금형에 처한다."

반면에 문화의 표준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명감에 불타서 196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처의 작은 마을에 레스토랑을 열고 '엘불리(elBulli)'라 명명했다.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되었던 이 식당은 14년이나 미슐랭 가이드의 별 세 개를 받았다. 엘불리는 전 세계 미식가들의 예루살렘이다. 미식가들은 성지 엘불리 순례 티켓을 따기 위해 1,000:1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예수님에게로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하듯이 엘불리 가는 길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엘불리는 하루 50명의 손님만 받는데 예약 전화만 250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엘불리의 진정한 주인은 손님이 아니라 음식이다. 천운으로 이 식당에 입성한 손님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40여 종류의 음식을 만나게 된다. '한 번 만든 음식은 다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엘불리 셰프들의 신념이고 자랑이다. 이 식당은 특이하게도 일 년 중 6개월만 문을 연다. 나머지 6개월 동안 셰프들은 다음 해에 선보일 요리를 위해 바르셀로나의 모처에서 음식 연구에 집중한다. 흰색 가운을 입은 셰프들은 마치 환자를 세심히 살피는 의사처럼 새로운 음식을 나누고 자르고 냄새 맡고 맛본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된 마냥 요리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식당 문을 닫고 음식 연구소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은 대장선에서 왜선을 노려보던 이순신 장군의 뒷모습처럼 늠름하고 비장하다. 그들은 식당을 열기 위해 요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를 연구하기 위해 식당을 연다.

 

이런 엘불리가 2011년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 돼서 폐업했냐구?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엘불리의 수석 셰프 페란 아드리아는 “엘불리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식당 일이 군사작전처럼 심각해졌다. 기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예전의 엘불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낭만이 없으면 창조도 불가능하다.”라며 감동적인 선언을 했다. 창의력이 퇴색한 음식을 내느니 차라리 폐업을 하고 예전의 창의력을 찾고 싶다는 경외로운 결의였던  것이다.


산업기술의 표준화는 편리함을 선물한다. 컴퓨터 저장장치인 USB는 첫 글자인 'Universal'이 함의하듯이 전 세계 어느 컴퓨터에서도 작동한다. 100여 년 전 포드는 표준화된 자동차 생산 공정인 포드 시스템 덕분에 자동차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간혹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표준화되지 않은 기기 때문에 짜증 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일명 '돼지코'라고 하는 전원 플러그가 그것인데 이게 나라마다 제각각이어서 범용 어댑터를 꼭 챙겨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요구한다.

 

하지만 문화의 표준화는 산업기술이 표준화와 결을 달리한다. 문화 표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화의 힘은 다양성과 개별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김치를 예를 들면 표준화된 김치가 만들어지고 힘을 발휘하면 표준화 김치가 모든 물고기를 집어삼키는 고래가 되어 언젠가 바다에서 잡히는 것은 고래뿐일 것이라고 우려한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김치 맛은 제각기 다르다. 재료가 다르고 손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다가 없는 유일한 지자체에서 자란 나는 고춧가루, 마늘 등 최소한의 재료만으로 맛을 낸 매우 소박한 김치를 먹었다. 그게 김치 맛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바닷가 도시로 오자 새우젓은 기본이고 생굴, 오징어, 갈치 등 다양한 해산물이 첨가된 김치를 만나게 되었다. 경이롭고 충격적이었다. 다양성이 삶의 풍요로움을 선물한 것이다. 만약 문화의 개별성이 존중된다면 큰누님도 김치산업진흥법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열기 김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문화 표준화를 바라보는 입장의 이면에는 문화를 재화 획득의 첨병으로 내세우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뿌리 깊은 논쟁이 자리하고 있다. 화폐경제 시대 이전의 문화는 상업성을 띠지 않았다. 정선, 김홍도가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적어도 그 시대의 그림은 현실에 대한 애정 표현, 정신 수양의 방편이었다. 하지만 화폐경제 시대에는 화가의 정신세계마저 돈으로 환산된다. 이제 화가들의 그림이 경매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시집은 거래의 대상이 아닌, 증정의 대상이었다. 일부 상업적으로 팔린 시집도 있었지만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필사해서 스승, 친구 등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역시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시집이 돈으로 거래되는 현상은 지극히 최근의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상업화된 시기에 문화만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고결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비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파도 속에서 문화 상품화 토론은 결론이 없다고 해도 충분히 유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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