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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Jun 04. 2021

(단편소설) 회색인들의 영토

3. 물푸레나무 같은 여자

오십 살의 의식으로 스무 살의 몸을 빌려 사는 것이 유리한 점도 있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우선 행동이 굼떠졌다. 스무 살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즉각적으로 행동했다면 오십 살의 의식은 생각이 길었다. 취해야 할 행동의 원인과 결과까지 모두 따져보고 나서 행동하니 모든 것이 늦었다. 신중했지만 무뎌졌다. 생활 패턴도 바뀌었다. '스무 살의 선우'는 새벽에 자고 늦게 일어났지만 지금의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9시 뉴스의 날씨 예보를 제대로 시청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고 아침 첫 지하철이 운행하기 전에 잠에서 깼다.

그래서 그날도 지하철 첫차를 타고 역에서 내려 30분을 걸어 올라가서 캠퍼스 제일 상부에 자리 잡은 학생회관의 동아리방에 도착했다. 학생회관에는 새벽잠을 자고 있는 수위 아저씨와 나, 그리고 건물 안팎을 감싸는 평화로운 정적밖에 없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도 없어서 동아리방을 청소했다. 다 하고 나서도 1교시 수업까지는 3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더디 가도 사람 생각 하지요』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라사랑’이라는 스탬프가 첫 페이지에 찍혀 있는 것을 보니 정문 앞의 사회과학 전문 서점 ‘나라사랑’에서 산 책이 틀림없었다. 북한을 다녀온 재미 기자가 쓴 책이었는데 책의 요지는 ‘북한이 경제적으로는 더디 가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동네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스무 살의 선우'라면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것 자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생각해서 낯선 사람이 '스무 살의 선우'를 쳐다보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덤덤했다. 이런 유(類)의 책이 당시에는 흘러넘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는데 동아리방 문이 열리면서 4월 초의 서늘한 아침 공기를 데리고 시은이가 들어왔다.

“어, 빨리 왔네. 아침 청소는 내가 다 했으니까 저녁 청소는 너한테 양보한다.”

시은이는 대답 없이 나를, 아니 내 손에 들린 책을 빤히 쳐다보고는,

“누가 남 책에 손을 대랬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참새가 순식간에 벌레를 낚아채듯이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아갔다. 간혹 빈정대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작두처럼 퍼렇게 날이 선 시은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 책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네 책인 줄 알았냐? 나는 선배들 책인 줄만 알았지.”

“왜, 이 책하고 나하고는 연결이 잘 안 되니? 내가 너무 곱게 자란 것 같아서 연애소설이나 어울릴 것 같아?”

시은이는 정도에 넘치듯이 화를 냈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책 좀 같이 보면 안 돼?”

“나는 내 삶에 누가 개입하는 거 싫어. 부탁인데 내 삶을 곁눈질이라도 들여다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러고는 싸늘한 아침 공기만 남기고 동아리방을 나가 버렸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다음에는 화가 났고 마지막에는 궁금해졌다. 자기 책을 남이 보는 게 왜 그렇게 싫을까? 오지도 않은 이리떼 때문에 미리 울타리를 치는 심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수업을 마치고 창작 노트를 사서 동아리방에 올라갔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볼 생각이었다. 첫 페이지를 열고 펜을 든 순간, 마치 시의 요정이 내게 빙의한 것처럼 나도 모르게 문학개론 교재에 있던 오규원의 시 ‘한 잎의 여자’가 떠올랐다. 책을 펴서 노트 첫 페이지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왜 그 순간 이 시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아마도 하루 종일 시은이의 마지막 모습이 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어서 뇌세포에 새겨진 강렬한 기억이 이 시를 호출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단어만 제거하면 이 시는 박시은이라는 스무 살의 가녀린 여자 아이를 그대로 모사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물푸레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모른다. 하지만 물푸레나무를 보게 된다면 곧장 시은이가 떠오를 것이라고 장담한다.

시의 마지막 문장을 끝내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 시은이가 내 뒤에 서 있는 것을 알아챘다.

“한 잎의 여자? 이거 시 아냐?”

아침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니 인생은 들여다보면 안 되고 내 인생은 막 들여다봐도 되냐?”

“참, 남자 놈이 쪼잔하게. 그거 니 인생도 아니잖아. 오규원 시인 인생이지. 그런데 소설 쓴다면서 왜 시를 쓰고 있어?”

“소설 쓸 때 흔히 시를 인트로로 깔고 가는 것 몰라?”

“그래서 한 잎의 여자에 관한 소설을 쓰시겠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자 등장 안 하는 소설 있냐? 어떻게든 엮으면 되지.”

“어떻게든 엮는다니? 소설 쓰는 게 뭐 농부가 초가지붕 이엉 엮는 거니, 아니면 경찰이 애먼 사람 잡아다가 엮어서 범인 만드는 거니? 넌 참 아직 소설을 너무 모른다. 소설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거야.”

어디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은이는 김수영까지 무덤에서 불러내면서 은근히 자부심 섞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정말 나보다 소설 잘 쓸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면 내기할까? 대학 문학상 누가 먼저 받는지.”

“그래, 그러지 뭐. 틀림없이 우리 둘 다 실패하거나 아니면 너 혼자 실패하게 될 테니까.”

나는 기가 막혔다.

‘이 근거 없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타인 멸시는 뭐지?’

그렇게 우리는 내기를 했다. 이긴 사람의 소원 들어준다는 진부한 상품을 걸고.

“나는 홀수 페이지에 소설 연습을 할 테니까 너도 생각 있으면 짝수 페이지를 이용해. 비워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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