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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소리 Jun 07. 2021

(단편소설) 회색인들의 영토

4. 회색은검은색과흰색을섞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농사꾼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에 의한 난징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1937년에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논에서 피를 뽑다가 인민군이 충주 시내로 행군하는 것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시내에서 울린 총성에 두려움에 떨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전쟁 후 군대를 다녀온 아버지는 굶주림의 시기와 새마을 운동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묵묵히 코딱지만 한 논에 벼를 심고 손바닥만 한 밭에 고추를 심었다. 가족들을 굶기지 않았으나 빈농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뜬금없는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던 1972년에 아버지의 다섯 번째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세상 밖으로 내던져졌다.      

 

미당의 시 ‘자화상’의 첫 문장을 패러디한 듯한 소설로 창작 노트의 세 번째 페이지를 시작했다. 누가 봐도 자전적이라고 단정할 소설에서 ‘세상 밖으로 내던져졌다’에 나는 진한 방점을 찍었다. 나는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엄마의 안온한 자궁 속에서 세상 밖으로 퇴출된 것이다. 나는 빈농의 아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빈농의 아들로 선택된 것이다. 어느 야멸찬 신이 나의 운명을 좌우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출생과 더불어 열등감과 부끄러움이라는 벗을 수 없는 갑옷을 입게 되었다. 그 녀석들은 27년 간 내 몸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구입하지 않은 억울한 인생을 비싼 값을 치러 가면서 살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오늘 저녁에 남자 동기들과 막걸리 한 잔 하기로 한 일이 떠올랐다. 담배 연기 자욱한 막걸릿집에는 이미 K와 또 다른 K, 그리고 J가 앉아 있었고 그 앞에서 놀랍게도 N 누나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N은 어디서 뭘 하는지 수업도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한 달 만에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아하니 N은 총학생회 간부들과 술자리에 왔다가 동기 남학생들을 보고 합석한 듯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속고 있는 거야. 이 정권은 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을 숨기려고 양가죽을 쓴 것에 불과하다고. 늑대가 양가죽을 썼다고 양이 되는 것은 아니야. 그냥 양가죽을 뒤집어쓴 비열한 늑대일 뿐이지. 아니, 그게 더 무서운 거야.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니까.”

N은 내가 자리에 앉아도 본 체 만 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친구들은 마치 얌전한 양들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해.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이 정권의 음흉한 공안정치를.”

“하지만 80년대처럼 직접적인 자유의 제약을 받는 것도 아니고 폭력을 폭력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사람들을 충동할 필요가 있을까?”

N은 한참 나를 쳐다보았다.

“중국에 가면 취하(醉蝦)라는 요리가 있어. 산 새우를 독한 술에 담가 놓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새우는 결국 사람들의 이빨 사이에서 으깨지는데 그때까지도 술에 취해서 고통을 모르고 죽는 거야. 위정자들에게 우리는 새우 같은 존재야. 그러니 우리가 술에 취하지 말아야지. 총학생회에서 신입생들을 위한 정치 강좌를 진행하니까 다들 와서 공부해. 매일 술이나 퍼 마시지 말고. 그러다가 진짜 새우 된다.”

N은 술을 마셨지만 과연 취하지 않은 듯 말투 하나하나가 명료했다.

“그래도 나는 조금 더 탐색해 볼래. 지금이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우글거리는지 세상인지, 아니면 진짜 양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세상인지. 그러니 우리한테 선택을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순간 N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졌다. 

“너 같은 사람을 뭐라고 하는지 아니? 바로 회색분자야. 검은 색도 아니고 흰 색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회색분자.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기회주의적인 삶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이 말을 회색이 들으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너진 것 같아 꽤나 서운하겠는데? 회색은 원래부터 회색인 거지 검은색과 흰색을 섞은 것이 아니거든. 초록색이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초록색이듯이. N 너도 아빠 반, 엄마 반이냐? 아니잖아. 너는 그냥 N인 거지.”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 그러다 언젠가는 시대를 치열하게 살지 않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날이 올 테니.”

이 말을 남기고 N은 자신의 우리로 돌아갔다. 남은 우리들은 남은 막걸리를 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치 이야기만 빼고.     


아버지는 중대 결심 끝에 1984년 온 가족을 이끌고 대도시로 전격 이주하셨다. 단돈 60만 원을 빌려서. 60만 원으로 우리 일곱 식구는 연탄불을 때는 단칸방에 세 들었다.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농사꾼에서 청소부로, 마당을 갖춘 세 칸짜리 시골집에서 단칸방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것 외에는. 하지만 나는 10층에서 자유 낙하하는 돌멩이처럼 추락했다. 나는 도시의 초등학교에서 더 커다란 열등감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도시 아이들은 깨끗하고 화사한 옷을 입고 다녔고 나는 때에 절은 옷을 걸치고 다녔다. 도시 아이들은 한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온 도시락을 들고 다녔고 나는 밥을 담자마자 차갑게 식어버리는 양은 도시락을 들고 다녔다. 도시 아이들의 말투는 밝고 활기찼으며 나의 말투는 낮고 음습했다. 결국 내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고 순한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담임 선생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나는 시골에서도 하지 않은 공부를 도시에 와서 했다. 교과서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그 결과 도난 사고가 나서 범인을 잡는다고 64명의 아이들이 단체로 의자를 들고 벌을 섰을 때,

“선우처럼 공부 잘하고 착한 애가 왜 같이 벌을 받아야 하니? 빨리 자수해라.”

라는 엄청난 칭찬을 들었다. 의자를 10분 넘게 들고 있어서 뻐근했던 팔이 한순간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담임 선생님의 순한 모범생이 된 것이다. 가난해도 두꺼운 외투만 있다면 눈보라 몰아치는 세상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장구히 배태되었던 권력에의 복종의 역사는 이때 처음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것일까?     


내가 5쪽을 마무리해도 2쪽과 4쪽은 여전히 하얗게 비어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시은이는 동아리방 출입도 뜸해서 청소를 모두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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