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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인 Jul 23. 2022

여름의 빌라_백수린

여름의 절정에서 읽으면 익숙하게 즐겁습니다

여름에 수박을 먹고, 겨울에 붕어빵을 먹는 것만큼 당연한 행복이 있을까. 조금 작위적일지 몰라도 그때 그것을 하면 예상만큼 좋은 것들이 많다. 제목부터 여름이 들어가 있는 책을 여름의 절정에 읽는 것도 그렇다.

왜 그런지 몰라도 단편소설을 읽으면 특히나 꿈을 꾸는 것 같다. 땅에 발을 디디고 서있는 감각이 평소보다 무뎌지는 기분이다. 장편을 긴 호흡으로 읽으면 인물들이 선명해져 한동안은 주변인처럼 느껴진다. 도통 이해 못 할 인물도 몇백 장이 되는 종이를 넘기다 보면 아니참 나쁘긴 한데, 그래도 걔가- 하는 수준의 옹호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단편으로 조각난 소설은 닿을만하면 끝이 나고, 이해를 좀 해보려 하면 다음 단편의 또 다른 알 수 없는 인물들이 튀어나와 다 읽고 나면 특이한 제목이나 내가 특히 공감할 만한 소재가 아니면 마구 뒤엉키고 만다. 그래서 어디 가서 자랑스레 나 그 책 읽었어 할 때 웬만하면 단편소설은 배제하는 편이다. 무슨 내용인데? 하면 읽지도 않고 횡설수설하는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있거든.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정리를 해두자 싶다.



[시간의 궤적]

화자의 현실감 넘치는 사고의 흐름에 소름이 돋았다. 나와 닮아 더욱 그랬다.


p.17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p.23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만큼 용기를 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니까, 걱정 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


p.36 행복에는 정해진 양이 있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다급히 내가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


나는 내 것을 못마땅해하고 남의 것을 특별하게 여기는 데 인생을 허비하지만 대부분 참아낸다.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이젠 뱉어내면 안 될 말들을 충분히 구별할 줄 아는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숨기지 못하는 감정이 있다. 내가 꺼냈지만 들킨 것만 같은 것들. 쏟아내면서 동시에 후회하는 날 것의 마음. 다음은 없을 거라 다짐하지만 또 그럴 때가 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여름의 빌라]

작가는 어떤 기준으로 단편 중에 한 개의 단편을 제목으로 고를까? 제목으로 했을 때 가장 팔릴 것 같은? 가장 마음에 든 단편? 가장 무난한? 확실한 건 여러 단편 중에 가장 이야기와 제목의 연결이 끈끈해 꽤 오래 남아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p.46 당신과의 연락이 소원해진 것은 내 삶이 엉망진창이라는 이유로 당신의 호의에 제대로 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오랫동안 나는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p.56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지호가 안타까웠지만 그의 의견에 오롯이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한스의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라는 말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로 자칫 쉽게 오해될 수 있지만 나는 그 상황에 맞는 행복을 찾아 누리며 사는 게 정답이라고 이해했다. 가난한 상황에 안주하거나 매몰되라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곤궁한 상황에 놓였고 그 상태를 어느 정도 지속해야 한다면 그것도 내 인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당장에 맞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



[고요한 사건]​


p.104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삶을 살게 되기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 단락을 읽으며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의 구절이 떠올랐다. 화자도 회상한 그 시점에서 더 시간이 지나면 쉽게 단정 지었던 이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젓게 되기를.



[폭설]


p.125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어쩌면 미국에 갈 때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엄마의 불행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이후 그녀에게 생긴 커다란 구멍처럼 엄마에게도 매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녀는 엄마가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실은 그녀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다.


누구든 한 번쯤 바랐을 마음. 끝난 관계를 뒤척일 때 항상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가끔은 내가 버린 것에까지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아니지만 너는 그러기를.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 같은 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가장 덜 와닿았던 단편. 그녀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이 많이 달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보편적인 캐릭터가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흑설탕 캔디]


p.179 할머니는 자신의 약점이나 불행을 타인에게 드러낼 줄 몰랐고 남에게 동정을 살 바에야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p.202 할머니는 생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하고. 노인의 삶이 사지가 마비된 뇌졸중 환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니. 이렇게 살아서, 할머니의 몸은 이렇게 살아서 이 모든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데.


p.203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여름의 빌라의 읽기 전에 흑설탕 캔디를 가장 좋았던 단편으로 꼽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 역시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아니지만. 평소 손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줬던 할머니가 꽉 쥐고 보여주지 않았던 이것은 브뤼니에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아닐까 추측한다. 할머니가 화자에게 해석을 부탁했을 때 대충 이야기하고 넘어간 순간 화자는 그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당시가 아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일기장을 뒤져 추측하고 만들어내는 걸 할머니는 이것은 너무 소중한 내 것이니 더 이상 함부로 정의하지 말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말로 화자는 약간의 죄책감과 후회로 이 공상을 끝냈다고 생각한다.


[아주 잠깐 동안에]

아무 불편한 마음 없이 끝까지 읽었던 단편. 담백해서 좋았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p.253 우리는 누구든 이 세계에 자신의 효용을 확인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법이니까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을 때 외로워진다.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고, 꾸며내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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