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거주자의 한국 여행기
손발이 차고 특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겨울이 싫다. 겨울에 입는 코트는 너무 무겁고, 가벼운 패딩은 덩치가 커서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곤해진다. 거기에 장갑이며 목도리, 발 시리지 않을 두꺼운 신발까지 장착해야 하니 겨울은 생각만으로도 고달픈 계절이다.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도 에너지가 부족한 계절,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글뤼바인을 홀짝이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우중충한 독일의 겨울을 버텨낸다.
당연히 뚱뚱한 겉옷 몇 개로 캐리어가 꽉 차버리는 겨울여행도 사양이다. 따뜻한 나라로 떠날 수도 있지만 겨울엔 여행 계획을 세울 마음조차 꽝꽝 얼어버리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내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언제나 뜨거운 여름날이다. 살랑거리는 옷 몇 개 넣은 가벼운 캐리어를 들고 출발해 화장품, 건조식품, 아기 한글 카드 등을 가득 채워 묵직하게 돌아오는 것은 나의 한국행 제1원칙이다.
올해도 우리 가족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간다. 손에 든 텅 빈 캐리어는 가벼웠지만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망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다. 기차를 타고 공항을 거쳐 괜히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한국에 도착하면 자가격리는 또 어떻고… 소문에 의하면 코로나 검사도 그렇게 괴롭다던데..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긴 통로를 지나 비행기 입구에 다다르자 예쁘게 유니폼을 맞춰 입은 승무원들이 밝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아무 감정 없이 보딩패스를 내밀다가 어서 오시라는 그 상냥한 인사에 내 마음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동안 얼마나 전투적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며 지내왔는지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깨진 이를 치료하기 위해 사전예약 없이 진료를 받으려 왠지 죄짓는 마음으로 병원에 전화를 걸고, 계약 조건보다 더 청구된 핸드폰 요금을 돌려달라며 항의하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지만 초인종 한번 누르지 않고 택배를 되돌려버린 택배기사를 원망하며 나는 독일어가 완벽하지 않은 동양 여자 취급을 받지 않으려 부단히 도 애를 썼다. 하지만 사실 나는 독일어가 아직도 어렵고 머리카락이 까맣고 키가 작은 동양 여자가 맞다.
우리 집 밖의 모든 독일인들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를 호구로 봐달라는 뜻과 같다. 나는 매일 독일어가 안 어려운 척, 자연스러운 척, 기죽지 않은 척하느라 지쳐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따뜻하게 웃어주는 승무원 앞에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진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답을 한다. 퍽퍽한 독일 생활을 하고 나면 비행 내내 웃는 얼굴로 음료와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승무원들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유명한 공중화장실의 문구처럼 최대한 깔끔한 자리를 남기려 애쓴다. 비행기 안 그날의 베스트 승객 대회가 있다면 나는 1등을 할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