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
수영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코가 찡해질 정도로 차가워진 공기로 새벽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형우의 시답잖은 농담에 깔깔 넘어가던 자신이었는데 언제 새벽이 된 건지. 익숙한 상황이어서 놀랍지는 않았다. 수영에겐 잠자는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홀연히 잠드는 버릇이 있었다. 눈을 뜨면 낯선 시간 속에 던져져 있곤 했다. 수영은 잠시 뒤척이다 몸을 돌렸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형우가 보였다.
분명 침대에 누워 떠들고 있었을 때는 이불을 덮고 있지 않았는데 깨어나 보니 이불이 덮여 있었다. 추위를 잘 타는 수영을 위해 형우가 덮어줬을 것이다.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은 수영뿐이었다. 형우는 이불을 덮기는커녕 깔고 누운 데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 그대로였다. 춥지도 않나. 롱 슬리브 파자마에 홈웨어 카디건까지 입은 자신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몸의 온도가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으면 이렇게 계절이 뒤섞인 광경이 연출되고는 했다.
수영과 형우는 초가을에 만났다. 선배의 소개로 형우를 알게 되었다. 기온이 한창 떨어지던 때였는데도 형우는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안 춥나? 수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형우만 여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을부터 이어져 온 두 사람의 계절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수영이 카디건을 걸칠 때 형우는 반팔과 반바지 차림 그대로였다. 수영이 옷장에서 케케묵은 코트를 꺼내자 형우는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수영이 패딩 속으로 몸을 숨길 때 형우는 코트를 입었다. 물론 한겨울인 지금 형우 역시 패딩을 입지만 언젠가 수영의 집에 도착해 패딩을 벗던 형우의 얼굴에 송글송글 맺혀 있던 땀을 기억한다. 넌 왜 그렇게 몸이 뜨거워? 수영이 물었을 때 형우는 부채질을 하며 저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렸을 적 더운 나라에서 나고 자랐다던 형우는 그곳의 열기를 뿌리까지 흡수해온 듯했다.
수영은 종종 형우의 여름을 상상한다. 이토록 뜨거운 몸을 가진 사람은 여름을 어떻게 버텨낼까. 여름을 살아가는 형우의 모습이 궁금했다. 가을에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는 형우는 여름에는 무슨 옷을 입을까. 겨울에도 목이 자주 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형우는 여름에는 몇 잔의 물을 마실까. 한겨울에 형우의 몸이 수영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처럼 수영의 몸도 형우를 식혀줄 수 있을까. 수영의 가족은 여름이 되면 수영의 몸이 시원하다는 이유로 팔뚝이나 손목을 덥석덥석 잡아오곤 했다. 수영은 그럴 때마다 화상을 입는 기분이 들어 짜증을 내며 팔을 비틀어 빼었다. 형우에겐 어떨까. 형우에겐 팔을 내어줄 수 있을까.
한참을 형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수영은 몸을 움직여 형우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형우는 잠결에도 수영의 기척을 느끼곤 수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형우의 다정하고 따스한 기운이 수영의 몸을 감쌌다. 여름에도 형우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우라면 시원한 팔을 내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