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국물
잠시, 배추이야기
오늘은 배추 한 망, 세 포기를 샀습니다. 난초 한 포기, 풀 한 포기라고 같이 쓰지만 배추는 듬직함이 남다릅니다. 한 포기를 살 수 있는 곳이 없어 한 망으로 구입하면서 왜 기준이 세 포기일까 생각이 들었는데 초록그물에 담긴 하얗고 푸르른 겹겹의 채소 덩이들을 양손으로, 팔로 어깨에 기대어 끌어안고 언덕을 오르다 보니 이건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최소 단위 정도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망의 무게는 10kg 정도라고 합니다. 이걸로 배추밥도 하고 물김치도 담그고 물김치는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시도할 예정입니다, 올리브오일에 볶아도 먹고 오늘은 맑은잎배추소고기탕을 할 생각입니다만, 배추 얘기는 여기서 접어두고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청양고추입니다. 청송군과 영양군의 청양고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나름의 진지한 말투로 적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노트는 요리와 옷깃만 스쳐도, 이런 옛 표현도 양해를 바랍니다 이건 뭐랄까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 하나를 꺼내 쓰는 것이니까요, 맘껏 쓸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거의 모든 이야기들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제가 만든 규칙입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밭에서 딴 청양고추는 그렇게 싱그럽게 매울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청양한 매운맛입니다. 입 속이 얼얼하면서도 오이 같이 아삭한 식감도 있고 생각보다 수분도 많습니다, 납작한 여행용 고추장통을 꺼내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청양고추를 찍어 먹으면 그야말로 맛이 배가됩니다. 달달하고 진득하게 매운맛과 청양한 매운맛의 기막힌 조합입니다. 제철에도 물론이지만 지금, 겨울까지 입맛이 떨어질 틈을 주지 않게 맛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먹던 집 고추장이 떨어져서 아쉽기는 하지만 시판 고추장의 매력도 있으니까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제품들을 먹어보고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놓아야 한다는 것! 집집마다 맛이 다르니까요. 이걸 무척 좋아하는 식구가 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게 청양고추를 사놓는 편인데요. 같은 채소가게에서 계속 구입하는데 겨울이어서 그런지 매운맛이 조금 덜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저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서 요즘 즐겨 먹고 있습니다.
청양고추가 냉장고에 있으면 고기를 넣은 맑은 국물 요리 맛을 잡아주는데 유용합니다. 맑은 배추 육수를 내고, 고기를 넣으면 배추육수 특유의 쨍쨍하게 기운찬 맛이 덜해지는데 그때 청양고추를 두세 개 넣으면 그것들이 흩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느낌입니다. 이 정도 비율이면 매운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별다른 것 없이 재료 고유의 맛있음이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우거지 선지해장국에 다진 양념보다는 다진 청양고추 한 스푼을 넣어 먹고 있는데요. 건조하던 창밖에 싸릿눈이 내리고 있어서 더 생각나네요. 얘기하다 보니 겨울이 청양고추의 계절인 것도 같고. 오늘은 좀 전의 오늘이 아니어서 오늘의 점심 메뉴는 배추된장국에 배추볶음입니다만 청양고추가 떨어졌기 때문에 저녁에야 맛볼 수 있습니다. 청양고추가 명확하게 1983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 봉지에 천 원 단위로 시장, 채소가게에서 사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
따뜻하고 청양한 겨울 보내시기를.